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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인 설정 & 엠프렉

 

 

                                                                            꿈에서 고양이가 나왔다

 

 

꿈에서 고양이가 나왔다. 흰 색의 포근한 침구 위에 본드는 느른하게 누워 있었고 옆엔 큐가 누워 있지 않아 약간은 불만스러웠던 것 같다. 불만스럽게 침구를 턱 밑으로 끌어당겨 화난 척을 하고 있을 때 즈음, 본드의 머리맡에서 뭔가가 꼬물대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큐일거라 생각한 본드는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부비며 눈을 마주쳤다. 고양이의 엉덩이가 보였다. 브루넷의 고등어 줄무늬를 한 털은 큐의 그것과 같았다. 본드는 이불 속에서 팔을 내밀어 고양이를 익숙하게 들어 품에 끌어안았다. 그런 본드가 귀찮은 듯 꼬리를 탁탁 치대는 것도 영락없는 큐였다. 본드는 웃으며 고양이를 끌어올려 얼굴을 마주보았다. 고양이는 이제 얼굴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 덕에 앳되 보이는 고양이가 사랑스러웠다. 끈질긴 본드의 시선에 눈을 감고 있던 고양이는 결국 눈을 떴고 그 순간 본드의 꿈도 깼다.

 

“!”

“제임스, 괜찮아요?”

 

잠에 취해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는 연신 본드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몸을 흠칫 떤 본드는 자신의 팔을 쓰다듬는 큐의 알몸을 끌어안았다. 꿈과 달리 본드의 연인은 흰 침구 속에 파묻혀 본드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본드의 갑작스런 포옹에 큐는 투덜대면서도 함께 끌어안아 주었다. 느릿하게 깜박대는 큐의 눈을 유심히 보는 본드였다. 암녹색의 안구. 아까 꿈에서 봤던 고양이는….

 

“나쁜 꿈 꿨어요? 아직도 애네.”

 

든든한 품 안에서 큐는 곧 잠에 들었고 본드는 여전히 뜬 눈으로 머리맡의 창을 보고 있었다. 까맣게 칠해놓은 밤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불 속 작은 체구는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로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커다란 등은 여전히 심란해 보였다.

 

*

 

태너는 본드의 테스트지를 꼼꼼하게 검사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검사라 별 다를 게 없음에도 오늘 본드의 집중력은 형편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언제나 불안정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큐와의 사내 연애로 예전보다 안정감을 찾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태너는 턱걸이를 하다 지쳐 주저앉아 있는 본드에게 다가갔다. 턱에 흐르는 땀을 거칠게 닦아내는 본드 앞에 앉은 태너는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큐와 싸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터무니없다는 식의 대답에 태너는 말없이 테스트지만 건넸을 뿐이다. 본드는 슬쩍 훑고는 다시 태너에게 돌려주며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가 보군.

 

“아무리 그래도 테스트 전 날엔 자중 좀 하시죠. 그, 더블오세븐의 악명은 이미 알고 있다만.”

“아냐,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정말 잠을 설친 것뿐이야.”

 

태너는 자신이 예상했던 개인사가 아니라는 걸 빠르게 판단한 후, 본드에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꺼려하던 본드는 태너의 집념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털어 놓는 본드의 말을 들은 태너는 결국 그의 고민을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그러니까 더블오세븐의 꿈에서 다른 고양이가 나왔다는 거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큐 밖에 없다고. 정말이야, 한눈 판 적도 없는데 대체 왜 그런 해괴망측한 고양이가 내 꿈에 나타난 건지 모를 일이군.”

 

태너의 의심 어린 눈빛에 본드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변했다. 큐를 만난 이후로는 다른 사람 상상조차도 안 했어. 그렇게까지 하시니 일단 믿어는 드리죠.

 

*

 

큐는 전 인구 중에서 얼마 되지 않는 수인이었다. 수인이란 본신은 동물임을 뜻했다. 이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평소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 나름의 사회구조라는 게 존재했다. 세상엔 다양한 동물 수인이 존재했고 그 중에 큐는 고양이 수인이었다.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MI6내의 수인은 그다지 특이한 존재가 아니었다. 본신이 동물인 수인들은 일반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데다, 두뇌도 뛰어나 첩보 요원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터였다. 큐가 고양이 수인이라고 밝혔을 때 본드가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은 그 또한 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본신을 본 큐는 한동안 본드를 피해 다니는 기행을 펼쳤는데, 그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 본드가 고양이 과의 맹수인 사자 수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큐를 어르고 달래 두 사람은 연인이 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두 사람은 파트너쉽까지 맺었다. 사실상 부부라고 볼 수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 사는 본드의 꿈에 다른 고양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차마 이런 사실을 큐에게 말하지 못하고 한참을 끙끙대는 본드는 태너의 눈엔 우스워 보일 지경이었다. 어린 마누라에게 잡혀 사는 악명 높은 더블오 요원이라니.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몇 번 내저은 태너는 여상하게 말했다. 물론 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큐랑 진지하게 대화라도 해보던가요. …어, 저거 쿼터마스터 아니에요?”

 

태너가 가리킨 방향에서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정말 큐가 맞았다. 하지만 가느다란 몸이 흔들릴 정도로 쿵쿵대는 건 그답지 않았다. 그건 마치 평소에 발터를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본드에게 화를 낼 때와 비슷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태너는 슬금대며 뒤로 물러섰다. 본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큐가 화난 이유를 가늠하고 있었다. 태너가 속삭였다.

 

“진짜 바람 핀 거 아니에요?”

 

한참 투닥대던 본드와 태너 앞에 선 큐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큐 손에 있던 종이가 우그러졌다. 그리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본드의 등짝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원인도 모른 채 맞고 있던 본드를 일깨워준 건 큐의 이 악문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콘돔! 끼라고 했죠!!”

“큐, 진정 좀 하고!”

“이게! 대체 뭐냐고! 어쩔 거냐고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본드 앞에 잔뜩 구겨진 종이를 내민 큐는 이제 제풀에 지쳐 헉헉대고 있었다. 소란에 놀란 태너는 큐와 본드를 번갈아 보며 설마 하는 얼굴로 경악하고 있었다. 본드는 큐가 내민 종이를 펼쳐보자 그게 MI6의 정기건강검진 결과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거기엔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ㅡ임신.

본드의 눈은 크게 뜨였다. 할 말을 잃은 채 큐를 바라봤고 큐는 이제 눈물을 글썽대고 있었다.

 

“피임 똑바로 했어야죠!”

“아니, 그게.”

“결혼 했으면 됐지, 이 나이에 임신까지 해요?”

“큐. 나 피임 했어. 항상 콘돔 꼈다고.”

 

패닉에 다다른 큐의 어깨를 꽉 쥔 본드는 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항변했다. 피임을 거른 적 없다고 몇 번이고 말하는 본드를 그제야 믿는 눈치였다. 대체 왜. 억울한 마음에 두 사람은 센터 내 닥터를 찾았고 거기서 닥터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콘돔은 100% 피임법이 아니에요. 거기다 사자 수인이라면 노팅할 때 커지는 페니스의 평균적 사이즈를 고려할 때, 콘돔이 찢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구요. 정말 2세 계획이 없었다면 모체인 분도 피임약을 따로 복용하시는 게 훨씬 안전 했을 거예요.”

“그, 그럼 이건…”

“네, 말 그대로 콘돔의 86.1% 가능성을 뚫고 들어간 밀레니엄 베이비죠.”

 

큐의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은 본드는 괜스레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닥터는 본드를 슬쩍 훑었다. 저 정도 사자 수인이라면 밀레니엄 베이비를 생산하는 게 놀랍지 않다는 확신을 가진 닥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12월 24일. 본드는 열흘 가량의 미션을 완수했다. 임신 사실을 안 직후 두 사람은 패닉에 빠졌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도 전에 본드는 미션 때문에 해외로 출국해야만 했다. 그 전까지 큐는 본드에게 데면데면하게 굴며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백업을 할 때에도 어찌나 사무적으로 대하던지. 하지만 본드의 솔직한 심정으론 큐의 임신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사자-고양이 수인 커플인 것치고 본드와 큐는 아이에 대한 집착이나 열망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 큐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본드는 마음 한 구석에서 느른한 안도감이 퍼졌다. 큐와 본드가 가족이라는 실감이 났고 그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해주는 것은 둘을 닮을 아이라는 존재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본드는 진심으로 자신과 큐의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이번만큼은 큐의 기분을 풀어주고 말리라는 마음으로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손에 쥐고 두 사람의 플랫에 들어섰다.

 

분명 오늘 입국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본드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방문을 열어제꼈다. 거실엔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벽난로 앞에는 커다란 양말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주인인 큐는 플랫 안에 보이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플랫을 본 본드는 마음 한 구석이 시려 왔다. 여전히 본드에게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야근을 하지 않을까 싶어 모바일로 태너에게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다. 거실에 선 본드는 초조하게 서성거리다 눈 앞에서 꿈틀대는 커다란 양말이 눈에 띄었다.

 

“…큐?”

 

설마 싶은 마음에 다급하게 두툼한 양말 속을 열어보자 그 안엔 녹색의 눈을 한 고양이가 본드를 빤히 바라보다 야오옹, 하고 울었다. 본드는 큐를 꺼내 드는데 순간 멈칫했다. 평소보다 묵직하고 불룩한 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큐는 본드의 손에 고개를 부볐다.

 

“큐, 우리 대화 좀 하자.”

 

애절한 본드의 말에도 큐는 못 들은 척하며 그루밍을 할 뿐이었다. 본드는 그런 큐 앞에 급하게 사 들고 온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큐는 본드와 선물 상자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본드는 숨을 들이쉬고 화가 난 고양이 앞에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화난 거 알아. 계획에 없던 임신은 정말 미안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이 기뻐, 큐.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당신이 그, 아이가 싫은 거 아는데. 그래도 난….”

 

몇 번이고 상자를 만지작거린 본드는 매끄러운 빨간 리본을 풀었다.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내 눈엔 이런 것 밖에 안 보이더라고. 메리 크리스마스, 큐.”

 

이제 본드 앞엔 배가 볼록한 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었다. 본드의 선물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하던 큐는 손을 뻗어 작은 아기 신발을 슬쩍 훑었다. 그런 모습에 본드는 말없이 큐의 손에 아이 신발을 올려주었다. 마침내 아이 신발을 꼭 쥔 큐는 본드에게 안겨 들었다. 본드는 그런 큐의 마른 등을 천천히 쓸었다.

 

“사랑해, 큐. 내 아이를 가져줘서 고마워.”

“…당신한테 화 난 거 아니에요. 그냥… 내 배 보면 당신이 징그러워 할까봐 그랬어요.”

 

작은 목소리로 항변한 큐의 말에 본드는 자신의 무릎에 앉아있는 그의 배를 빤히 보다가 천천히 쓸었다. 평소보다 볼록한 배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안에 있을 생명의 기운을 느낀 본드는 큐에게 키스를 했다. 그 순간 큐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고양이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알몸으로 본드의 품에 안겨있는 큐는 몸을 바르작댔다. 근사한 크리스마스 저녁을 먹자고 속삭이는 큐에게 본드는 나직하게 말했다.

 

“바깥은 추워, 베이비. 우리끼리, 우리 가족끼리 잠시만 이러고 있자.”

 

창 밖에선 이제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고 본드는 큐의 몸에 담요를 둘러 꽉 안았다. 새하얀 눈으로 고립된 그 순간, 본드는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 없던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본드 곁에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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