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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ltz for Merry 

 

 

밤길의 끄트머리에 쌓인 눈이 가로등 불빛을 먹고 노랗게 피어나는 새벽 두 시, 잠든 런던은 오르골이 고장 난 스노우볼 같다. 성에꽃이 만개한 창가에 가까이 다가서 얼굴을 마주 댄 Q의 이마 위로 눈송이 하나가 날아와 부딪히고, 얼마 있지 않아 사르륵 녹아내린다. 녹은 눈송이가 물방울이 되어 유리벽을 타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Q의 눈길 끄트머리가 말갛다.

 

창밖 풍경에서 눈길을 돌린 Q가 M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철을 집어 든다. 잠시 켜두었던 스탠드 불빛을 끄고, 문을 향해 걸어 나오다 뒤돌아 본 M의 사무실은 어둠에 잠겨 적요하다. 아마도 저 빈 자리의 주인은 지금쯤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은 채 오늘 하루도 고되었더라고 말하고, 그이의 곁에 누워 고조곤히 숨 쉴 것이다. Q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서서히 좁아지는 어둠 속으로 메리 크리스마스, M. 하고 속삭인다. 서류철을 옆구리에 낀 채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며, Q는 문득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꼭 이맘때 쯤, 본드와 Q는 처음 만났다.

 

*

 

어느 날 그에게 생각보다 근사하지 않은 말투로 ‘좋아해’ 라는 말을 듣고 난 뒤로부터, Q는 본드와 처음으로 마주했던 날인 크리스마스마다 그때처럼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손을 잡았다. 딱히 정해진 기념일 같은 것이 아니었기에 오늘이 그날이네요,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스치듯 흘려보내도 좋을 법 했으나, 어느 아름다운 문명의 아름다운 관습처럼 그들은 기꺼이 1,440분의 시간을 함께했다. 간혹 그가 Q가 있는 곳과 제법 멀리 떨어진 어느 좌표에 홀로 서있을 때면, 그들은 허공에 놓인 길 하나를 두고 서로의 목소리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전례 없이 Q의 시간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나란히 설 때면 항상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살짝 기울어지는 본드의 어깨 자락조차도 볼 수 없을 만큼, 그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에 공연히 심술이 난 Q가 소복이 쌓인 눈을 두텁게 뒤집어쓰고 있는 돌멩이 하나를 괜스레 발끝으로 툭 건드린다. 그러다 가만히 뒤를 돌아 태양을 등진 채 내리는 눈을 조용히 흘려보내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빛을 먹고 까맣게 풀어진 길 위에 자신의 그림자 하나만 길게 늘어져있는 것을 본 Q는 문득, 한없이 먹먹해진다. 어서 일을 끝마치고 플랫으로 돌아가 현관문 발치에 엎드려 잠들어있을 고양이들에게 꽤 이른 아침인사를 건네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철 위로 사근히 눈이 쌓이는 것을 보던 Q가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무지의 눈길 위로 Q의 발길이 하나 둘 그려진다.

 

*

 

신발 밑창 사이의 녹은 눈 때문에 거무죽죽해진 복도를 바라보며, Q는 눈이 다 녹고 나면 바닥을 청소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던 Q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진다.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군가의 발자국이 한 길 더 찍혀있다. 발자국의 뾰족한 앞코와, 바깥으로 살짝 어긋나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곧은 모양새가 눈에 익다. Q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다. 그러다 무언가를 알아챈 듯 설마, 하고 중얼거리며 다급히 연구실로 걸어간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자신의 책상 모서리에 가만히 손끝을 대고는, 쌓여있는 서류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익숙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Q는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엉망인 제 책상 위를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 짓는 그의 눈가가 따스하다는 생각을 한다. 인기척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퍼뜩 고개를 돌려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눈이 좋다는 생각도 한다. Q는 본드, 하고 입술을 오므려 그의 이름을 부르곤 최대한 사랑스러워 보이려 눈가를 구겨 웃는다. 큐우, 하고 늘 그렇듯 끄트머리를 부드럽게 늘려 Q를 부른 그가 한 손에는 Q의 머그컵을, 다른 한 손에는 물방울이 송송이 맺힌 샴페인 병을 들고 걸어온다. 그리곤 머그컵을 슬쩍 Q의 가슴께로 건넨다.

 

“샴페인?”

 

그가 묻는다. 머그컵 안에는 Q가 본부에 다녀오기 전 미리 타놓았던 홍차 대신 거품이 보글보글 오르는 샛노란 샴페인이 담겨있다. 사랑스러운 장난을 쳐놓은 아이를 다정하게 나무라듯 뭐예요, 하고 핀잔을 준 Q가 머그컵을 건네받고는 입 안에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는다. 혓바닥 위로 톡톡 터지며 따끔하게 녹아드는 샴페인의 단 맛이 나쁘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샴페인이 담긴 컵 안을 가만히 응시하다 문득 비춰오는 제 추레한 몰골을 보고, Q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한다. 금세 부끄러워진 Q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본드가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는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오고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진데다, 늘 입는 고지식한 카디건에 추레한 야상을 걸쳐 입은 제 모습이 마음에 걸려 몸을 살짝 뒤로 빼려는 Q를 보던 본드가, 오른손으로 Q의 뺨을 감싸고는 진득하게 눈을 맞춰온다. 본드에게는 입을 맞추는 것보다 훨씬 달콤하고 감미롭게 눈을 맞추는 재주가 있다. Q가 낮고 부드럽게 굽은 그의 속눈썹과 시푸르게 물결치는 눈동자에 조금씩 녹아들고 있을 때, 문득 본드가 Q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쥔다.

 

“보여줄 게 있어.”

 

*

 

본드의 손이 이끄는 대로 바깥을 향해 나와 방금 전 다녀왔던 본부 건물로 되돌아가고,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고 하나의 문을 지나자 Q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런던의 야경이다. 옅은 안개를 숄처럼 두른 채 항상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빅벤의 첨탑과 바람이 부는 방향에 맞추어 펄럭이는 수십 개의 유니언 잭, 지나가는 차 한 대가 없어 흰 카펫을 덮어 쓴 교차로와 점등식을 기다리며 어둑하게 잠든 거대한 트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본드와 함께 지낸 시간동안 별의 별 상황을 겪어본 탓에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게 된 Q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본드의 검은 코트 자락과 Q의 낡은 야상 끄트머리가 바람에 펄럭이고, 그와 손을 잡은 채 난간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Q는 한참동안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잠들어있는 무언가는 대부분 평화롭고 사랑스럽지.”

“이곳에 올라와도 괜찮은 거였는지 여태껏 몰랐는데 말이죠.”

“경치 하난 끝내주지.”

 

대꾸한 본드가 고개를 돌려 Q를 바라보고 가볍게 웃는다. 그와 마주보고 앉은 Q의 검은 속눈썹과 녹은 눈송이의 물기가 한데 뒤엉켜있다. 본드는 어떤 바람 같은 것이 제 가슴을 한 차례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Q의 손을 쥐고 있던 본드가 그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Q가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본드가 다시 한 번 Q의 허리 위로 팔을 감아온다.

 

“스카이폴 투입 직전에 단어 연상 테스트를 했거든. 그때 질문으로 ‘달빛’이 나왔는데, 거기에다 대고 ‘춤’이라고 대답했었지.”

“……설마 여기서 달밤에 춤을 추자는 건 아니겠죠. 난 달리기 이외의 모든 신체적 활동 능력이 제로베이스에 가깝다구요.”

“글쎄, 적어도 왈츠를 추면서 리드 당하는 것도 감당 못 할 정도로 통나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을 마친 뒤 Q의 앞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선 본드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오른손을 내민다. 그가 내민 손끝을 멀뚱히 보고만 있던 Q가 마지못해 그의 손을 슬며시 잡는다. 빨갛게 물들어있는 귀 끝이 그저 추위에 얼어 그런 것인지, 수줍음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자연스럽게 Q의 등을 감싸 안고 자세를 취한 본드가 눈이 쌓이는 소리를 음악 삼아 왈츠를 추기 시작한다.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본드의 발걸음과 더듬거리는 Q의 발걸음이 바지런히 오간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엮였다 풀리기를 반복하며 눈 쌓인 옥상 바닥에 하나 둘 원을 그려나간다. Q는 본드에게 슬쩍 중심을 기운 채 그와 발 박자를 맞추려 허둥거리고,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모르는 풋내기 소녀 같은 표정을 짓는다. 맞닿은 이마 사이로 삼십 촉짜리 달빛이 고요를 환하게 메운다. 두 사람의 걸음이 섞일 때마다 본드의 그림자가 Q의 그림자 위로 길게 눕는다. 차오르는 숨결에 춤이 멎자, 두 사람은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본다. 제임스, 하고 이름을 부르며 안경테 너머로 본드를 올려다보는 Q의 눈동자가 투명하다. 본드는 제, 임, 스, 하고 제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옴씰거리는 Q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깨문다. 뭐하는 거예요, 본드. 제게 핀잔을 날리며 아프지 않게 어깨를 툭 때리는 Q를 보던 본드가 퀜틴, 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하얀 입김이 두 사람의 입매 주변으로 옅게 피어오르고, 한참동안 Q를 바라보던 본드가 그에게 짧게 입 맞춘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찰나 수많은 생각과 삼켜진 뒷말이 찬란하게 부서지고, 온기가 남은 자리에는 손을 꽉 맞잡을수록 강하게 들려오는 심장 고동이 한참을 두근거린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Q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본드는 잘 알지 못한다. 또 이전처럼 좋아한다고 툭 던져볼까. 그건 너무 투박한가. 오래된 재즈 시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당신이 요즘 내 세상의 전부라고 말해볼까. 그런 말은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마침내 본드는 오늘처럼 황홀한 기억의 전야에 가장 걸맞은 말 한 마디를 기억해낸다. Q의 눈을 바라보고 하나씩 숨을 고르며 그는 서서히 서정에 가까워지고, 기억해낸 말을 더듬으려 입술을 뗀다.

 

*

 

……이후 두 사람이 어떤 설렘과 기대를 잇고 다가오는 새벽을 지새웠는지는 조금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대신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열 네 글자에 담긴 그 마음, 평범해서 더 아름다운 그 발음들을 조금 천천히 음미해보기로 하자. 몇 번의 밤을 걷고 아침을 지나 또 한 번의 첫 만남을 만나게 될 때까지. 언젠가 모든 것이 무너진 수많은 폐허의 한가운데 그들은 따로, 또 함께인 채 쓸쓸한 포옹을 나누고 있을지 모른다. 맞닿으면 따뜻해지는 서로의 품속에서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들을 함께 바라보며, 동화처럼 전해 내려오는 오랜 왈츠를 추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음악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그대와 발끝을 맞추며, 쌓이는 사랑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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