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크리스마스
1.
그해 크리스마스는 다른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비록 둘이 몸을 담그고 있는 곳은 소위 말하는 '평범' 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땐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크리스마스였다.
큐브랜치에서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며 졸음의 헤드뱅잉을 하던 Q는 본드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기 전까진 얕은 꿈나라에 빠져있었다. 방금 전까지 털을 뿜지 않는 고양이들만이 존재하며 버그는 싸그리 멸종한 천국에서 놀고 있던 Q는 본드의 얼굴과 함께 그가 곧 미반납할 장비와 전 세계인이 휴식을 취하는 크리스마스 연휴임에도 쉬지 못하는 자신이 떠올라 얼굴이 찌푸려졌다.
"007, 장비는요?"
".....Q, 나랑 체스 둘래?"
"말 돌리지 말고요."
Q의 집요한 질문공세에 본드는 결국 자신이 장비를 현장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의 3시간짜리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찰나 본드는 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자신과 체스를 두어 Q가 이기면 다음번에는 장비를 꼭 가져올 것을 하늘에 맹세하고 본드가 이기면 이번 건은 눈 감아 달라.’
본드의 예상 외로 Q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단호박처럼 ‘안 돼요’ 를 일관할 줄 알았던 본드는 솔직히 말해서 꽤 당황하였다. 본드에겐 속을 알 수 없는 Q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살인면허00 요원답게 평정심을 유지한 그는 자신감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도박천재 르쉬프와의 도박에서도 이긴 자신이었기에 게임은커녕 업무만 붙잡고 살았을 것 같은 너드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Q에게도 내기를 수락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본드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한때 Q도 월급루팡질을 위한 지뢰 찾기나 컴퓨터와의 체스를 잘 두곤 했다. 체스로 컴퓨터를 이긴 전적이 있는 천재와는 달리 늙은 퇴물요원의 뇌는 물러 터졌다고 생각한 그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체스에 응한 것이었다.
"체크메이트(checkmate)예요 본드."
Q의 백마들로 둘러싸인 자신의 흑색왕을 바라보는 본드의 표정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만심은 실패의 어머니라. 이제 꼼짝없이 장비를 챙겨와야 하는 그에겐 장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두껍디두꺼운 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Q는 본드의 얼굴에서 그가 삐졌음을 알 수 있었다.
본드가 말했다.
"프로모션(promotion) 진짜 반칙이야. 그거에 당했어. 걔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긴 판이었어."
체스판의 검정하양 체크무늬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젓는 그에게 Q는 최연소 쿼터마스터답게 그의 말에 대한 오류를 자세히 찾아 주었다. - 어쩌면 재수없게 -
"One, 프로모션은 반칙이 아니에요. 프로모션은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는 룰은 아니지만 바로 오늘 게임의 승부를 판가름하는 아주 중요한 규칙으로써의 역할을 똑똑히 했어요. 폰이 상대편 진영 끝까지 가면 자신의 원하는 말들 중 하나로 승급할 수 있는 룰이 프로모션이고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당연히 퀸을 골랐을 뿐이죠.
Second, 당신은 제 트릭에 훨씬 아까 전부터 넘어가 있었어요. 다만 당신이 인지하지 못했을 뿐. 한마디로 여러 군데에서 당한 것이죠. 따라서 프로모션 하나 때문에 '다 이긴 판을 졌다' 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Q의 말이 끝나자마자 본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Q는 물론이고 본드자신조차 그 헛웃음의 정체를 몰랐다. 체스에서 진 것이 억울해서 일까. 어쩌면 오랜만에 얼굴에 활기를 띄우며 자신과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는 Q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웃음의 근원을 찾아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던 본드에게 Q가 말했다.
"그래서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날 둔 체스의 교훈은?"
"몰라. 그리고 꼭 그런 걸 찾아야해?"
Q는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짓는 본드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어차피 자신이 말을 시작하면 귀 기울여 들어줄 본드였기에 -
“한곳만 바라보다 보면 다른 귀중한 것들을 놓치게 돼요. 너무 다른 사람의 편을 의식하면 아군의 방어태세를 잘 갖추지 못하고, 반대로 너무 자신의 말만 바라보고 수비만 신경 쓰면 상대의 속임수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 아무리 두꺼운 방어벽이라 해도 끝내 뚫리고 말죠.“
Q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본드가 말했다.
“결론은 자만하지 말라는 거냐?”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질문을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빠져나가는 Q를 보며 본드는 또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젊음이 혁신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며 Q를 무시하던 자신에게 반박을 펼치던 Q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 이건 좀 아닌 듯 - Q가 부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웠던 그는 Q의 얼굴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니까 이런 호사쯤은 누려도 되겠지. 점점 올라가는 본드의 입꼬리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기 시작했을 때, Q가 말했다.
“근데요, 007. 저는 체스가 좋아요. 물론 어렸을 때 업무 땡땡이용으로 즐겨한 것이 체스긴 하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체스가 좋아요. 가장 쓸데없고 머릿수나 맞춰주는 존재가 끝에 다다라선 전장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패가 되죠.”
“너 자신을 말하는 건가? My Quartermaster?"
Quartermaster의 Q를 세게 발음하며 본드가 물었다. 그러자 Q는 몇 년 전 내셔널 갤러리에서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지으며 되물었다.
“왜요 찔려요?”
Q의 그 한마디는 본드를 놀리고자 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Q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가 들어있었다. 과연 ‘천하의’ 살인면허요원 제임스 본드도 자신과 같은 속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그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속을 내보이면 나는 세계 최초로 그의 차가운 마음을 녹인 사람이 아닐까.
짧은 시간이 흘러 본드가 대답했다.
“하.... 아냐... 나는 그런 거랑은 잘 안 맞거든.”
‘거짓말.’
Q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무리 철통같은 포커페이스라 해도 Q는 방금 그 대답에서 거짓말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인간다운 면모에 Q는 안심 아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본드도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났다는 사실을 잘 알겠지.
“어찌 됐던 체스 잘 뒀어요. 007. 그리고 다음번에는 장비 가져오는 거 잊지 마요.”
“옛날과 변한 게 없어.”
“그게 제 매력이겠죠."
찌르릉-
바로 그때 Q의 탁자 위에 있던 시계에서 12시를 알리는 알람음이 울렸다.
“Merry Christmas, Q."
“Merry Christmas, Bond."
2.
새벽 3시. 정확히 3시간 전에 체스를 두다 M에게 걸린 둘은 얄짤없이 다시 업무를 봐야했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걸린 학생들처럼 M의 눈치를 보며 퇴근을 꿈꾸던 Q와 본드에겐 새벽 3시의 퇴근이라 해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물론 본드는 Q처럼 일을 하지 않았다. 사실상 큐브랜치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Q하나였으며 대부분의 다른 직원들은 본드처럼 게임을 하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Q는 피곤에 찌들어 있는 얼굴들을 보며 본드에게 먼저 집에 가라고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니까 너랑 같이 퇴근할래.”
가 그의 주장이다. 그의 황소고집을 누가 꺾으랴.
야심한 새벽, 두 명의 남자가 어두운 런던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둘 중 한명은 멋진 금발과 벽안에 겨울용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다른 한명은 곱슬머리에 안경을 쓰고 자신의 야상을 코까지 덮어 최대한 추위를 피하고자 했다. 겉모습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는 본드와 Q는 성격 또한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서로를 좋아하고 특별한 것에 흥분하는 사람이었다. 그해의 크리스마스가 딱 그런 날이었다. 서로의 인간다운 공통점을 내보이며 상극인 사람 둘이 하나 되던 날.
“그렇게 입으면 안 추워요?”
“그렇게 입는 것 보다는 추운 게 나아.”
아무리 열심히 코디를 해줘도 다음날이면 원상복구가 되는 Q의 패션에 본드는 거의 항상 삐져있었다. Q와 본드 모두에게 서로의 패션은 미지의 세계였다.
‘어떻게 옷을 저렇게 입을 수 있지?’
어찌됐던 둘은 크리스마스날의 상큼한 야근을 마치고 홈 스윗 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둘의 플랫은 같은 거리에 있었고 MI6 본사 건물과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다. 물론 차로. 새벽 3시에 버스나 택시가 다닐 일도 없고 얼마 전의 임무에서 본드가 새로운 차량을 부숴버렸기 때문에 둘은 집까지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늘 Q가 야근을 한 이유도 그가 부숴먹은 차를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집에 도착하면 가장먼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얼 그레이 (또는 보드카 마티니) 한잔을 마셔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걸어가던 중 Q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어. 눈 오네요,”
Q의 말은 사실이었다. 끝까지 열을 보존하기 위해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의 안경에 무엇인가 떨어졌고 곧 그것은 투명한 액체로 변해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하나 둘씩 떨어지는 눈은 Q의 점퍼를 적셨고 둘은 동시에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눈이 내리는 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간간히 켜져 있는 가로등에 비추어 내려오는 하얀 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눈이 입안에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Q에게 본드가 다가갔다. 본드는 그대로 가만히 또한 천천히 Q의 새하얀 목선을 관찰하고 있었다.
본드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Q가 고개를 원상복귀 시키며 말했다.
“007. 눈 정말 예쁘지-”
Q의 다음 말은 본드의 입술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둘의 뺨은 차디찼지만 입술만은 따뜻했다. 12월 25일 새벽 3시 런던시내의 한 가로등 아래서 단둘의 시간을 보내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았다. 점점 많아지는 눈송이는 둘의 눈꺼풀에 떨어져 물방울을 만들어 냈지만 상관 쓰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누가 뭐라 해도 둘만의 시간이었다. 지금 Q에게 본드와의 첫 키스는 무슨 맛이었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그는 ‘추운 겨울의 맛’ 이라고 답할 것이다. 둘 사이에 내리는 눈은 아침이면 소복하게 쌓여 산타의 선물을 풀어보는 아이들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선사할 것이다. 비록 본드와 Q같은 어른들은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눈을 싫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마냥 즐겁게 웃는 아이들을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또 눈들은 꽁꽁 얼어붙어 다음날 출근하는 Q와 본드에게 빙판길 위의 팝핀댄스를 선사해 주겠지만 바로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크리스마스.
Epilogue
그날 아침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난 Q는 가장먼저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낯선 사람의 물소리와 밤 동안 옆방에 갇혀있었던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침대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그와 본드의 옷가지와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고 Q는 자신과 본드가 열정적인 밤을 보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몇 초 후 자신의 플랫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Q의 머릿속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재생되었지만. 물소리와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본드가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 일어났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본드에 Q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밤중의 그 일을 생각해서 화를 가라앉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던 사람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애써 태연 한 척 하며 옷을 주워 입고 물을 마시던 큐에게 본드가 말했다.
“처음치고는 잘 하던데?”
갑작스레 정곡을 찌를 본드의 말에 Q는 물을 뿜으며 개의치 않은 분수쇼를 하였다. 남자와 하는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흥분된 와중에도 부끄러운 약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한 Q였지만 본드의 눈썰미를 속일 수 는 없었다. 민망한 주제를 전환하기 위해 Q가 말했다.
“몸이 굉장히 따뜻하네요.”
“방금 샤워했으니까. 너도 따뜻하네.”
다음은 Q가 본드의 말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튀어나올 뻔 한 말이다.
그게 아니에요. 당신은 원래부터 너무 따뜻해서, 나와는 달리 너무 아름다워서 당신의 따뜻함이 날 채워준 거예요.
몇 시간 전 눈을 맞으며 사랑을 나누던 그때와 달리 눈은 그쳐 있었다. 물론 창밖의 런던은 차가운 눈으로 뒤덮힌 새하얀 동화나라 같았지만 어딘가 한 구석은 따뜻해 보였다. Q와 본드가 그랬듯 옆집에서도 밤 동안 연인끼리 사랑을 나누며 온기를 전달했을 지도 모른다. 길 건너에 사는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산타의 선물을 보고 기뻐하며 부모님과의 따뜻한 포옹과 더불어 아침식사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하던 Q와 본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던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공허함과 동시에 차가웠던 자신의 심장에 온기가 불어넣어지니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