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방금 뭐라고...?”
“실전훈련이라고 했지.”
“아니, 그러니까 그걸 제가 왜?”
테너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나. M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지시한 일이니 자신의 의견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의미겠지.
“제가 쿼터마스터라는걸 M은 기억하고 계신 겁니까.”
“설마. 자네가 Q 브랜치를 대표한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Q는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갑자기 실전훈련 같은걸 받아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미 M은 마음을 정한 듯하였고, 한번 정해진 일에 대하여 M에게 반박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 또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언제부터 해야 하는 거죠?”
“다음주부터.”
“오늘 목요일인데요??”
“그래. 다음 주 월요일부터. 더블 오 세븐이 자네의 실전훈련을 도와줄 거야.”
“젠장”
Q는 인상을 썼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요원들 중에 더블 오 세븐. Q가 인상을 쓰던 말든 테너는 훈련 일정을 전해주고는 곧바로 브랜치를 나갔다. 조용해진 브랜치에 홀로 남아 Q는 어지럽게 널려있는 무기들을 바라보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
월요일 아침. 평소보다 이른 아침을 맞이한 Q는 조금은 비몽사몽인 채로 본부에 도착했다. 근 일주일째 이어져 온 철야로 어제 역시 새벽 늦게야 잠이 들어 간신히 두어 시간 눈을 붙였을 뿐이었다. 시계는 정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본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Q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피곤함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본부는 실내임에도 제법 공기가 차가워 두툼한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Q는 의자 위로 다리를 올려 끌어안고는 머플러로 둘둘 감싼 고개를 파묻었다. 피곤하다. 몸을 움직이는 건 질색인데. 실전 훈련이라면 대체 뭘 하는거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얼핏 들려 번쩍 고개를 들었다. 본드였다.
“잘 잤나?”
“.....언제 왔어요?”
“한 20분정도 전에?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있어야 말이지.”
본드의 말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일순 현기증이 핑 돌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Q를 부축하듯 잡은 본드는 Q의 어깨를 살짝 두들기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하아. 정말 싫다.
*
실전훈련은 말이 실전이지, 기초 체력훈련이나 다름없었다. 현장요원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한번 하고 났을 뿐인데 그새 녹초가 되어버린 Q를 보며 본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상상보다 더 최악이군. 난 백업요원이라고요. 예상은 했어. 상상보다 최악이라면서요. 가르칠 보람이 없을 것 같다는 의미지. 남말하지 말아요. 무기 만들어 주는 내 보람은 늘 그렇게 버리고 오면서 무슨.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 누구 때문에 늘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느라 바쁘거든요. ...한 셋트 더 하지. 뭐라고요? 이대로는 안된다니까. 조금만 더 쉬면 안돼요? 갈 길이 멀어. 이제 시작인데 쉬기는 무슨. 진짜 죽을 것 같거든요? 그 상태로는 어딜 가도 위험해. 내가 갈일이 뭐가 있어서.. 잔소리 하지 말고 시작하지? 숨이 턱까지 차오른 Q는 본드의 채찍질에 후들거리는 팔로 팔굽혀펴기를 다시 시작했다. 이러다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피로 누적으로 죽을 것 같다.
본드의 가르침은 혹독했다. 가차 없는 체력 단련으로 인해 브랜치에서 작업을 하다가 졸기 일쑤였다. 그렇게 실전 훈련을 받은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 역시 훈련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박 잠이 들었다. 아직은 밤샘작업과 훈련을 병행할 만큼의 체력이 되질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주변은 어느새 어둑해져있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저만치 놓여있던 간이 의자에 앉은 본드가 눈에 띄었다.
“더블 오 세븐?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요?”
“어디보자. 한시간정도 되었나? 많이 피곤했나봐. 세상모르고 자던데.”
한 시간이나 잤다니, 세상에. 밀린 일이 산더미인데 정신 나갔어. 허둥대며 랩탑의 파일을 체크하는 Q를 보며 본드는 거침없이 다가와 랩탑을 닫고는 Q를 일으켰다. 잠깐 쉬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일이 많이 밀려서 안... 이대로 끼니도 거르고 작업 할 텐데 저녁 식사만 하고 오자고. 툭하면 끼니를 거르니 체력이 붙을 리가 있나. 나가자고. 본드는 어느새 Q의 점퍼를 손에 들고는 Q를 재촉했다.
“지금 그게 다 먹은 건가?”
“난 당신과는 다르다고요. 이정도면 충분해요.”
“그러니 체력이 붙질 않지.”
Q가 남긴 음식을 보며 어느새 본드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체력훈련을 받으며 알게 된 부분인데 본드는 의외로 잔소리가 심하다. 처음에는 그저 귀찮은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말들이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얼마 전의 이야기다. 본드는 자신의 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Q의 접시까지 깔끔하게 해치우곤 일어났다.
레스토랑 밖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리에는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어차피 별로 상관없는 날이니까- 근처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곡이 매끄럽게 들렸다.
“제법 좋은 곡을 틀어두었군. 오랜만에 들어.”
“아는 곡이에요?”
“흠. 꽤 유명한 곡인데.”
“...미안하게 됐네요. 이런 것도 모르는 쿼터마스터라서.”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네?”
“곡 제목이야. 전장의 크리스마스라고도 불리지.”
전장의 크리스마스. 왠지 모르게 그 말이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
며칠 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던 문득 Q는 본드와 저녁을 먹던 날, 거리에서 들었던 피아노곡이 떠올라 인터넷 창을 열었다. 검색 결과가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것이 정말 유명한 곡인 듯 했다. 잔잔한 듯 강한 건반과 현의 합주가 마음에 와 닿았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본드에게 현장은 늘 전쟁 같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괜히 한숨이 났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져갔다. 아무래도 밤새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침에 샌드위치 한 조각 먹은 뒤로 차만 몇 잔 마신게 전부였지. 피곤이 짙게 밀려온다. Q는 랩탑을 닫고는 브랜치를 나섰다.
뭐라도 간단히 먹고 올 생각으로 나섰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늦은 터라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그렇게 시내를 하염없이 돌던 Q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이 느껴졌다. 평범한 시선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현장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건 뭔가 다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미행하고 있었다. 다행이 실전 훈련을 하는 동안 회피 법은 배웠다. 그게 잘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시도 해 보는 수밖에.
허나 현실은 달랐다. 어중간한 Q의 방법은 잘 통하지 않았다.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에 잔뜩 긴장해버려 평정심 따위는 떠올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빠른 걸음이 곧바로 뜀박질로 바뀌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한명이 아니었다. 자신을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늘어갔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이라면 일반인이 아닐 것이다. 그건 분명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리다. 더 이상 뛸 수가 없다. 점차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로 뒤까지 따라온 자들이 점퍼의 모자를 잡아 끌어당겨 Q는 결국 뒤로 나동그라졌다. 나동그라진 Q를 향해 온갖 욕설과 함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가뜩이나 가쁜 숨에 발길질과 손찌검이 더해져 정상적으로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폭력에 몇 번이고 벽과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안경은 첫 발길질 이후 어디론가 떨어져버렸다. 흐릿한 시야에는 흐르는 피로 붉은 빛 만이 선명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꺼내드는 나이프가 어둠속에서 번뜩였다. 허리에 느껴지는 강한 고통에 결국 Q는 의식을 놓고 말았다.
-상대가 어디서 어떻게 공격할지 모르는데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건가?-
-좀 더 빠르게!-
-끼니를 제대로 챙겨야 체력도 느는 법이야. 그렇게 먹어서 어디 힘이 생기겠어?-
미안해요. 당신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는데도 결국 난 못했어요. Q는 자조하듯 웃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팔과 다리는 강하게 묶여 탈출은 물론 그 어떠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고 다리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는 좁디좁은 방 안에 갇힌 신세다. 이런 곳에 홀로 묶여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내어줄 것이 없는 그를 향한 분노는 강했다. 분노는 그의 몸 여기저기에 깊은 상처를 만들어 냈다. 그 상처들로 인한 출혈과 고통은 Q를 갈수록 무력하게 만들었고, 좁은 방 안은 이미 피 냄새로 가득했다. 자꾸만 흐려지는 의식을 잡으려 애를 썼지만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익숙한 멜로디. Merry Christmas Mr. Lawrence-. 그때의 그 곡이다. 차분하게 흐르는 피아노의 음색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더블 오 세븐. 당신에게 현장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런 상처들과 고통을 안고 계속해서 싸워왔던 걸까. 마치 전쟁과도 같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버텨왔을까.
그가 보고 싶었다. 깊고 푸른 두 눈이 자신을 바라볼 때면 마치 모든 걸 다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아 늘 시선을 피했었다. 이제와 그 시선이 그리울 줄이야. 지금의 날 보면 당신은 뭐라고 할까. 바보 같다고 할까. 화를 낼까.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으려나.
*
밖에서 어렴풋이 총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 욕설, 싸우는 소리. 하지만 소리에 신경을 쓸 기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떨어져 가는 체온에 온 몸을 맴도는 한기가 심해져 간다. 바닥은 아무리 오래 있어도 온기를 머금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 덜덜 떨리는 몸을 조금 더 움츠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밖이 고요해졌다. 잠시의 정적. 곧 누군가 Q가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려고 하는지 문고리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자꾸만 공포가 밀려온다.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공포감이 몸을 점차 지배하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온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을 계속해서 쾅쾅거리며 두드리던 누군가는 결국은 포기했는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끝난 것일까. 허나 잠시 후.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은 굉음을 내며 부서졌고 곧이어 환한 빛이 쏟아졌다. 감긴 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Q!!”
그다. 그의 목소리다. 묶여있는 팔다리를 급하게 풀어낸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Q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신 차려. Q. 눈 좀 떠봐. 다시는 듣지 못할 줄 알았던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졌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고는 흐릿한 시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감이 짙게 깔려있었다.
“날 알아보겠어, Q?”
“......여긴 어떻게...?”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찾아냈어. 이제 다 끝났다고. 넌 안전해.”
그는 Q의 몸에 난 상처를 살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의료팀이 오고 있어. 금방 괜찮아 질 거야.”
“나, 나 바보 같죠? 당신이 가르쳐 줬는데... 결국 아무것도 못해서...”
“그렇지 않아. 잘 했어. 덕분에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충분히 잘 했어. 잘했어 Q.”
정말로?
“실망하지 않았어요...?”
“넌 날 실망시킨 적이 없어. 단 한번도.”
다행이다. 실망시키지 않았어. 실망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안도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안도감과 함께 졸음이 쏟아졌다.
“....졸려요.”
“아직 아니야. 잠들면 안 돼.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의료진이 올라오고 있어.”
하지만.. 몸이 너무 아파... 이대로 잠들고 싶은데...
“정신 차려, Q.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크리스마스야. 넌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니. 나에겐 당신이 커다란 선물 같은데. 너무 커서 다 받을 수 없는 그런 선물...
“....전장의 크리스마스네.”
무언가 떠오른 듯 Q는 느릿하게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Merry Christmas, Mr. Bond."
Q의 말에 본드는 낮게 웃었다.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그에게는 충분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본드는 Q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고는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Merry Christmas, 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