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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인 설정 & 연하공

 

 

                                                        여름날의 사자, 겨울밤의 고양이

 

 

하나, 둘, 아니면 수십. 어느 정도씩은 주어져 있는 길과 알약처럼 챙겨 먹는 착각. 몇 번이나 꼬인 오해로 서른 해를 보내고 나면 바보도 결국 깨닫는 바가 있다. 수치를 더하자면 그것은 약간의 우연과 사십 퍼센트는 넘을 운명을 적절히 섞어 놓은 길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강요가 틀림없다. 딱 서른 번째 생일을 맞는 해의 첫 날, 머그컵을 떨어트려 발치에서 산산조각 내 버린 후에 생각했다. 비포장도로로 갈지, 깨끗하게 닦인 직선 도로로 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정해져 있는 손발을 움직인다. 이왕 선택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짧은 걸로. 빛날 필요는 없다. 메말라 갈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누구나 원하는 적당한 만큼의 시련. 역사가 오래된 천성이었다. 번쩍도 반짝도 아닌 깜박. 손잡이만 겨우 살아남은 머그컵 잔해를 주워 버리고 비비와 루시를 끌어안은 채로 겨우 잠이 들면서도. 뭐든 납득하고 받아들이기에 바쁜 나이였다. 내게 주어진 만큼의 생활.

 

그래도 인생에 있어 손에 꼽을 만한 몇 가지의 이정표는 세워지기 마련이다. 가령 내게 첫 번째 이정표는 입사였다. 당시의 나는 스물 둘. 아픈 줄 알면서도 웃는 방법을 아는 때였다. 영국 첩보 기관에서의 제의, 정확히는 입사를 위한 교육을 시켜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었다. 입학도 빨리, 졸업도 빨리,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사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던 어린 내게 주어진 새로운 삶이었다. Q라는 코드네임을 받고 변두리 학교의 교사로 신분이 위장된 새 신분증을 지갑에 넣었을 때 나는 그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문제가 있었다면 비비와 루시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연구실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건에 대해 M이 특별히 허가를 내려준 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다―정도.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쿼터마스터였다. 일반적인 요원이 겪는 루트처럼 말단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렸다. 무거워진 어깨가 무섭기도 했다. 그 시간이 8년이었고, M이 내게 주었던 믿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제임스 본드가 내 삶으로 끼어든 것은 시기로 따지자면 오년 전이다. 당시에는 스물 넷. 젊고 혈기가 넘쳤다. 보통은 J로 불렸다. 더블 오 요원들의 임무를 돕는 현장 보조직이었다. 처음 눈에 들었던 것은 특이한 성질 때문이었다. MI6에서는 살인면허를 받지 않은 요원이라도 맹수 수인들을 대상으로 특별 케어 시스템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특히 제임스 본드는 백사자 수인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핏줄을 타고난 탓에 관리 대상에 들었다. 요원의 생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던 나는 수인 특별 훈련 및 관리본부에서 그를 처음 마주했다. 허리를 숙이고 몸피를 늘려 사자 형상을 갖춘 제임스 본드가 어슬렁거리며 훈련실 안을 거닐고 있었다. 서로를 눈앞에서 대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마주했다고 하기에도 부족함은 있다. 어쨌거나 자세가 안정되었다는 것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하얀 몸체와 갈기, 새파란 눈동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었다.

 

다음부터는 임무 중에도 가끔 제임스 본드에게 눈을 두는 일이 생겼다. 나의 일은 주로 더블 오 요원들을 백업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를 직접 백업한다거나 대면을 한 적은 없었지만, 간혹 화면으로 잡히는 본드의 모습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 무렵부터 M이 본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를 호출하여 일의 경과를 살펴보다가도 몇 번씩 그의 이야기를 꺼냈고, 한번쯤은 지켜보라며 관련된 파일을 건네기도 했었다. 기초 체력이나 훈련 성과는 일반 요원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그 밖에 요원을 보조하며 참여했던 임무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타고난 피 때문이기도 했다. 더블 오 섹션의 다음 후임을 정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J의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요원이라 꼽는 M의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대강 그것들을 읽어가다가 문득 사진 두 장에 시선을 두었다. 인간으로의 얼굴과 사자로의 모습이 따로 찍혀 나온 사진 속 눈동자는 역시 전처럼 파랬다.

 

 제임스 본드가 결국 진가를 인정받은 것은 더블 오 세븐이 사망한 임무에서였다. 더블 오 세븐이 목숨을 걸고 얻어낸 정보가 담긴 기기를 폭발로부터 구해낸 사람이 본드였던 것이다. 더블 오 세븐은 변변한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폭발에 휘말려 사망했고, 본드 또한 함께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폭발이 일어나면서 모든 연결망이 끊어져 비상에 걸렸던 큐 브랜치는 필사적으로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었다. 요원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정황 상 사망했을 확률이 높았지만 희망을 놓기는 일렀다. 닷새 쯤이 지났을까, 미션의 실패와 더불어 더블 오 세븐과 현장 요원 J, K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게 되었을 무렵 거짓말같이 J가 MI6으로 복귀했다. 손에는 예의 USB를 든 채였다. 관을 국기로 덮고 조의를 표한 지 며칠 후 공석이 된 더블 오 자리를 누구에게 넘길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당연한 결과로 그것은 본드의 차지가 되었다. 그 때가 스물일곱. 딱 삼 년 뒤의 일이고, 나는 그보다 셋이 많은 서른이었다.

 

“직접 뵙는 건 처음입니다.”

 

내가 없는 연구실에서 빈 머그잔을 들여다보고 있던 제임스 본드와의 첫 대면. 얼마 후의 임무를 대비한 것이었다. 입 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은 그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수인 특유의 높은 체온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 나는 내 앞의 남자가 한 마리 맹수임을 실감했다. 나보다 조금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덕분에 몸이 더 커 보였다. 나는 수인이 아니므로 해당되는 바가 없었지만, 동물 사이에서는 무언의 느낌이라는 것도 존재하는지 본드보다 약한 수인들이 그의 앞을 지날 때 조금은 위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비와 루시가 몸을 세우고 사납게 울어대는 것만 봐도 그랬다. 고양이를 둘이나 키우시나 봅니다. 그 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본드의 손을 놓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차트를 집어 들었다.

 

“……더블 오 세븐. 한 달 후에 임무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실 테고, 그에 대비해 간단한 테스트를 거친 후 무기를 제조, 지급할 예정입니다.”

“흠.”

“관련 기사는 읽어보셨나요? 오늘 아침 신문에…….”

“여기. 고양이 털 묻었는데.”

 

말이 뚝 끊겼다. 웃는 얼굴로 내 셔츠 단추 부분을 가리킨 본드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털 한 가닥을 떼어냈다. 조금 멍한 기분에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그것이 내가 화를 내도 좋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는 눈이 아프도록 젊었고, 뜨거웠고, 또 무례했다.

제임스 본드의 성격에 대해서는 단연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다혈질. 물론 피 속에서 끓고 있는 맹수 수인 특유의 무언가가 작용하는 바도 있겠지만, 그는 다른 더블 오 섹션의 요원들과는 조금 달랐다. 테러조직 간부의 집회에서 예견되는 테러의 정확한 목적과 지역을 알아낸 다음, 최종적으로 그 테러를 막으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은 현장에 파견되어 있었던 본드의 행동으로 무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임무를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건물 두 개가 무너지고 안에서 집회를 갖던 조직 간부 및 그의 측근들이 사망했다. 죽지 않고 잔해 틈에서 도망친 간부 하나를 잡아 제대로 혼쭐을 낸 본드가 테러의 목적 및 지역에 관한 정보를 캐낸 다음 간부의 뒷머리를 기세 좋게 내려쳤다. 모든 순간을 화면으로 보고 있던 내가 결국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자 곁에 서 있던 태너는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왔다. 그뿐이었겠는가. 지급한 무기의 회수율은 내가 지금껏 근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수치였다. 무려 0%. 단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서져 조각이 난 위치추적기도 그 수치에 포함해야만 한다면 한 일 퍼센트 쯤은 더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제 마음대로 움직여 계획을 바꾸는 것도 모자라, 큐 브랜치에서 거진 한 달의 시간과 나랏돈을 들여 개인 맞춤 제작한 무기들을 죄다 내버리고 왔다는 것이다.

 

“큐. 오다가 샀는데요.”

 

그러고는 뻔뻔하게도 핑크색 리본이 달린 상자를 내게―불쌍할 정도로 조각조각이 나 버린 위치추적기와 함께―내밀었다. 어느 순간부터 은근슬쩍 말을 놓기도 했다. 무기만 가루를 내 놓았다면 또 몰라. 현장 요원의 감을 믿으라며 백업을 무시한 것도 열 손가락을 넘은데다 온 정신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차는 강바닥에 주차시켜 놓고 돌아오기가 일쑤인 주제에, 복귀할 때마다 조그만 선물을 사 오는 작태에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들이미는 상자를 무시하고 있으려면 제멋대로 그것을 내 책상 위에 내려놓고 어깨를 두드리곤 했다. 이런 걸 사 온다고 당신이 한 일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말로 짚어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M은 낮은 목소리로 불평하는 나를 격려했지만 그뿐, 격려가 그 놈의 사자를 막지는 못했다.

 

*

 

처음 어른이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십 대의 끝물을 타고 있었다. 십의 자릿수가 하나에서 둘로 바뀌는 동안에도 내게 변화를 상기시키는 특별함은 없었다. 아이에서 어른, 좀 더 커진 키로 새로운 풍경을 맞이하는 과정에 동반되는 설렘이나 아쉬움이 내게만은 무지였다. 조기졸업과 입학, 틈에 섞이기에는 어렸고 울타리 바깥에 있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어느 시계에 나를 맞추고 발을 움직여야 하는지 정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침에 따라 스물이 되었다. 그 때의 나는 한편으로는 무기력했지만 그만큼 무모하기도 했다. 시계가 돌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을 넣어 태엽을 감았다. 그것이 나를 적당한 만큼으로 살게 했다. 둘이 셋으로 바뀌고 내가 삼십 대가 되는 전 해에는 닳아 끄트머리가 보이던 무모함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컵을 깨트리고 묵묵히 조각을 주워 버리면서 손끝에는 살짝 베인 상처가 났었다. 그 위에 밴드를 바르면서 생각했다. 이맘때의 무기력. 소진된 나.

 

골골거리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불이 꺼진 방의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깜박거렸다. 그 무기력의 끝에는 고양이 대신 문젯거리를 껴안은 요원이 떠올랐다. 과연 그가 저를 위해 고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 줄은 알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지만.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깜짝 놀란 나는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곧장 몸을 일으켜 서랍 안에 두었던 총을 꺼냈다. 주머니 속에 항상 넣어 두는 호출기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거실에 찬 바깥바람이 들고 있었다. 열린 창문과 반쯤 찢기다시피 한 커튼에 경악하기 전,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달빛에 눈이 시릴 정도로 비치는 흰 갈기였다. 제임스 본드. 그는 얼굴을 들어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코를 찡긋거리더니 툭 고개를 떨어트렸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질 정도로 놀라 총을 내려놓은 내가 그 쪽으로 다가갔다.

 

“더블 오 세븐…… 괜찮습니까? 내 말 들려요?”

 

낮게 으르렁거리던 그가 몸피를 줄여 인간으로 되돌아온 다음에는 벗은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옆구리 부근에 자상이 있었다. 언제부터 다쳐 있었던 것인지, 호흡이 불안정하고 열이 난다는 것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을 바쁘게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그의 상처 위를 눌렀다.

 

“우선 본부에 연락할게요. 조금만 참아요.”

 

순 골칫덩어리, 문제밖에 일으키지 않는데다가 스트레스 유발 요인을 꼽는다면 0순위라고만 생각했던 장본인. 바로 그가 내 플랫의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다는 것이 내게 약간의 패닉을 준 모양이었다. 전화를 걸어 애써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려는 손은 노력이 무색하도록 덜덜 떨고 있었다. 입술을 연신 깨물며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본드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그 때였다.

 

“큐.”

“…….”

“큐. 이리 좀 와줘요.”

“어디에서, 아니, 어쩌다가 다쳤어. ……본부로 연락을 해야지 여기로 오면 어떡해.”

 

여전히 상처를 옷으로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요원 신분을 존중해서 해 주고 있던 존대가 생각지 못한 사이에 무너졌다. 그는 내 모습을 누운 채로 올려다보다 픽 웃었다. 죽을상을 하고 피를 흘리는 주제에 여전히 뻔뻔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화가 치밀었지만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안경을 쓰지도 못하고 급하게 나온 탓에 흐리게 보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지혈을 해보려 애를 썼다.

 

“창문 열어놓고 자는 당신이 더 웃겨. 나 말고 나쁜 사람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창문…….”

 

분명 열렸는지를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착오가 있던 모양이었다. 본드는 말 중간에 낮게 신음소리를 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놀란 내가 상처를 너무 세게 눌렀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과를 한 나는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그가 멋대로 말을 놓는 것을 무례하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도 그 때문에 느끼지 못했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누르고 있던 옷을 조심스럽게 본드의 손으로 넘겨주고 몸을 일으켜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파란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어느새 깨어나 울어대는 고양이 소리만 들렸다.

 

“그냥 생각이 나서 왔는데…….”

“…….”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은 보고 가야지 싶잖아요.”

 

로맨스 영화라도 감명 깊게 봤는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런 말을 늘어놓는 그에게 평소처럼 뭐라고 면박을 하지 못했다. 그가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아내고 여기까지 왔는지, 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 따위의 수많은 질문이 지우개로 지워내듯 사라졌다. 삼십. 그리고 유치한 뜨거움. 눈이 시리도록 더운 체온이 문득 느껴졌다. 무기력, 나는 뜨거움에 약했다. 애써 체온을 무시하며 찬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화상을 입는 느낌. 나는 그게 아팠다.

 

“말 하지 말고 있어.”

“큐. 나랑 데이트 해줘요.”

“…….”

“당신 눈 정말 예뻐. 나랑 데이트 해요.”

“본…….”

“크리스마스에 같이 있을 사람 없잖아. ……아, 고양이랑 있을 건가?”

 

생각하는 법도 잊었다. 멍하니 그를 보고만 있었다. 뻔뻔한 얼굴을 하고, 터진 옆구리로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농담 따먹기나 해 대는 모습은 평소의 사자가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미사일을 맞은 것처럼 놀라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있었다.

 

“데이트 하자고요.”

 

그 때 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쫓기는 사람처럼 문으로 다가갔다. MI6로 배속되어 있는 의료팀이 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문을 열었다. 그들이 축 늘어진 본드를 들것에 싣고 플랫을 나갔다. 요청으로 함께 차에 올라 본부로 향하면서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데이트 해요. 그 소리가 머리 주위에서 맴돌았다.

 

데이트 타령은 옆구리를 꿰매 놓은 본드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무리된 이전의 임무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단독행동을 하다 다쳤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꺼내는 그에게 내가 화를 내야 할지 칭찬을 해 주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쿼터마스터의 주소는 어떻게 알았냐는 M의 질문에 본드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보고 있던 M은 본드가 말한 내용에 대해서 태너에게 조사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제임스 본드에게는 며칠간의 근신 처분이 내려졌다.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라도 항상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그의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주기 위한―지속적인 나의 요청이기도 했다―조치였다. 그렇지만 그 때만 해도 그것이 내게 몇 배의 악영향을 미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데이트 해요. 마실 물을 받는 도중에 뒤에서 불쑥 나타나기는 기본, 훈련실에서 훈련을 하다가도 내가 보이면 냅다 뛰쳐나오곤 했다.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면서 데이트를 해 달라며 시종일관 귀찮게 굴어 댔다. 나는 항상 고개를 저었고 일부러 그를 피해 도망치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제 본드는 무기를 부수고 오지 않아도 내게 선물을 사다 안겼다. 자질구레한 간식에서부터 온갖 기념품, 고양이 용품까지. 본드는 내가 그의 선물을 거절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도 본드 나름의 해결책이 있었는데, 복잡한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현장 요원의 기지를 발휘해’ 몰래 와서 놓고 가는 식이었다. 아직 뜯어보지도 않은 선물이 산을 이루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제 막 새로 올려 져 있는 초록 포장지의 작은 상자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데이트 해요. -007' 곱게도 눌러 적은 쪽지를 보며 한 번 더.

 

근신이 끝나고 나서는 말 그대로 지옥문이 열렸다. 거듭된 거절과 무시에 고개를 떨어트리고 포기하기는커녕, 본드는 점점 더 대담해지기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임무 탓을 하며 큐브랜치에 들러 대는 그 때문에 결국 007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쿼터마스터 발 공식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자꾸 추근거려 대는 통에 일에 집중을 할 수 없는 것도 이유였지만 맹수 수인 특유의 기운으로 인해 브랜치 내의 초식 수인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비 수인을 대상으로는 이미 전 요원에게 실시하고 있는 시스템이지만, 그와 조금 차이가 있는 수인 요원의 혈액이나 몸 상태에 따른 특수 버전을 시험 중에 있습니다. 위치는 물론이고, 요원의 신체 상태까지…….”

“큐. 요즘 더 마른 것 같아요.”

“……알 수 있도록 하여…… 여러 방면에서 효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상.”

 

너 때문에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느냐 소리를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스마트 블러드 건에 관해 그에게 보여주고 있던 화면을 껐다. 들으라는 설명을 듣기는 했는지, 아니면 내 뒷모습이나 보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얼굴로 나를 향해 있는 그의 눈을 마주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나가.”

“내가 살 찌워줄게요. 나랑 밥 한번만 먹어요. 응?”

 

그 밤 이후로는 꼬박 존대를 해 오는 본드에게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된 것이 나의 실수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본드는 그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무릎 위로 뛰어오른 고양이를 껴안고 잠깐 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싫어.”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소원이라면 한 번 쯤은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해 줄까,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이유는 다 떼어놓고도 그는 나와 너무 멀리 있었다. 서 있는 길이 다르고 잡고 있는 끈도 다르다. 사자와 고양이. 변덕이 심한 계절의 낮과 눈이 날리는 밤. 도저히 그 차이를 뛰어넘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무기력이 내 손가락 틈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손과 발을 움직일 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멀리뛰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시작도 그 정도, 끝도 그 정도로. 나는 그 순간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삶이 이제 내게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었다. 이해받을 수 없는 삶. 뜨거움을 바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체온이 낯설었다.

 

본드는 요원으로서, 인간으로서도 다른 사람과 다르기는 했다. 먼저 나를 이해하는 척을 꽤 잘 한다는 사실에서 그랬다. 징그러울 정도로 고집이 세고 한번 문 것은 절대 놓지 않았다. 혈기가 넘쳤다. 뜨거웠다. 분에 넘치는 온도로. 임무 중에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하는 모습을 애써 못 본 척 무시하며 몇 번이나 생각했다. 본드는 타겟과 잠자리를 갖기 전이나 그 후에는 꼭 비상용으로 지급된 쿼터마스터 직통 연결 기기로 연락을 했다. 그런 용도로 준 것이 아닌데도 제멋대로 연결을 한 그에게 뭐라고 매몰차게 굴지도 못했다. 뭐 해요? 네 백업. 좀 쉬어요. 그랬다가 너 죽기라도 하면 내 책임이야. 내가 죽는 게 왜 당신 책임이에요. 너는 모르는 게 있어서 그래. 그래요? 응. 그럼 저 절대 안 죽을게요. 사람들이 죽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아? 전 절대 안 죽어요. 약속할게요. 죽으면 당신이랑 데이트를 못하잖아요. 끊어. 네. 잘 자요, 큐. 자동 녹음되고 있던 연락 기록을 내 손으로 지우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몇 번이나 다른 길을 밟고 새 흙이 묻은 신발을 바꿔 신어도 결국 제자리였다.

 

*

 

생각해 보면 그 날에도 눈이 왔었다. 첫눈을 맞아 보기는커녕 털끝 하나도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때. 더블 오 세븐이 타겟과 접촉해 지시받은 임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 수십 개의 감시 카메라를 순차적으로 돌리며 초조하게 입술을 씹던 내 눈에 포착된 것이었다. 분명히 본드 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남자. 더블 오 세븐, 열한 시 방향에 수상한 사람이 있어요. 그는 한참 타겟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중이었으므로 화면 속에서 별다른 대답을 하거나 알았다는 제스처를 취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 때였다. 바쁘게 남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던 도중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총소리가 울렸다. 비명. 그리고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순식간에 모든 카메라와의 연결이 끊겼다. 더블 오 세븐과의 통신도 먹통이었다. 전 직원이 비상에 걸려 눈이 뻘겋게 될 때까지 화면을 바라보며 자판만 두드렸다. 임무는 이대로 실패인지, 그가 아직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지, 만약 죽었다면…… 문득 그 날 이른 아침 내게 연락을 해 거기에는 눈이 오냐는 둥 시시한 소리를 했던 본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같이 눈 맞고 싶었습니다. 아저씨 같은 말투로 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것에 픽 웃고 만 나는 일에나 집중하라며 먼저 연결을 끊었었다.

 

“근방의 CCTV부터 연결합니다. 가까운 곳부터 대로변을 따라 먼 곳까지 넓혀 나가요. 도망쳤다면 그쪽밖에 마땅한 경로가 없으니까…….”

 

바싹 마르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목이 깔깔했다. 카메라가 다운되기 직전에 신원 파악이 완료된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역시 모종의 조직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본드가 만나기로 했던 타겟과는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정보를 캐내려던 타겟의 생사 여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연회장 내부의 카메라는 이미 모두 먹통이 되어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폭발의 여파로 건물이 일부 무너지고 부상자가 생긴 모양이었다. 근방의 모든 CCTV를 동원하여 그의 흔적을 찾았다. 큐 브랜치의 모든 직원들이 새벽까지 동원되어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찾았습니다!”

“이 쪽으로 연결해주세요.”

 

결국 다시 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새벽 네 시 경이었다. 아주 찰나였으나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차를 타고 추격전을 벌이는 그의 모습이 잡힌 화면이 띄워졌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적으로 연결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깨물어댄 입술에서 결국 피가 맺혔다. 따가운 느낌이 드는 상처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며 본드의 이동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를 돌렸다. 그러나 그것에도 결국 한계가 있었다. 산 쪽을 돌아 사라지는 본드의 차와 그를 쫓는 두 대 정도의 차량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비상이 걸릴 때부터 내려와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현장에 파견되어 있던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M은 이마를 찡그렸다. 그래도 본드는 아직 살아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사실에 반쪽짜리 안도감을 가지고 있던 나를 깨달았다. 그럼 저 절대 안 죽을게요, 서류로 처리되어 도장이 찍힌 것도 아닌 얄팍한 약속을 그가 꼭 지킬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현장 요원의 평균 수명은 서른다섯이었다. 운이 좋아 그보다 더 오래 살아남거나, 혹은 더 일찍 죽거나.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놀랍지 않은 위치. 그러나 그 얄팍한 약속에는 본드가 주는 이상할 만큼의 믿음이 있었다. 전 절대 안 죽어요, 약속할게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애들이 하는 유치한 계약처럼 손을 내밀고 새끼손가락을 걸지도 않았으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약속.

 

해가 뜨고 바깥에서 하루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전 직원이 날을 꼬박 샜다.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기기로 연결된 인이어에서 조그맣게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

 

-……큐.

“……!”

 

그의 목소리. 기계에 문제가 있는지 아주 작게 들렸다. 나는 큐 브랜치 직원들에게 모든 행동들을 멈추라며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고는 본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여전히 노이즈가 심했다. 언제 연결이 끊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본드? 당신 맞아요? 괜찮습니까?”

-……는…… 이에요.

“잘 안 들립니다. 기기에 문제가 있습니까? 한 번만 더……”

-……이름 불러주는 거 처음이에요.

 

이 쪽은 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잠도 자지 못하고 골머리를 앓았는데 대뜸 한다는 말이 그랬다. 뻔뻔하게도 낮은 소리로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친 목소리.

 

“위치가 파악되면 헬기를 보내겠습니다. 몸은 괜찮나요?”

-난 괜찮지만 그 쪽이 준 건 또 못 쓰게 돼 버렸는데. 어쩌나.

 

여전히 중간 중간 끊기는 음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억지로 화를 눌러 참았다. 바쁘게 손을 움직여 기기에 내장된 GPS를 활성화시켰다. 아마도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 먹통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얼마지 않아 그의 위치가 파악되어 작은 점으로 찍히는 화면을 확인하고, 그제야 막혔던 숨을 푹 쉬었다. M은 그 위치로 헬기를 보낼 것을 지시했다. 인이어에서는 본드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헬기를 보냈습니다. 잘 숨어 있어요.”

-…….

“…….”

-큐.

“…….”

-내 말 듣고 있죠?

 

브랜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운데 선 나는 혼자서 얼음이었다.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는 목소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돌아가면 데이트 해주세요.

 

나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그래, 오늘이 크리스마스였구나.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 멀리서 커다란 트리 불빛이 보였다. 해가 뜨고 있었다. 아침. 눈.

 

“……돌아오면…….”

-…….

“……생각해 볼게.”

 

그리고 고집 센 사자.

 

*

 

“작년은 기억나?”

“뭐가.”

“그럼 재작년은요?”

“음…….”

 

같이 저녁 먹었었나.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떡해. 천재 맞긴 맞아요? 어깨를 으쓱거리곤 잘라 놓은 스테이크를 입 속으로 한 조각 밀어 넣었다. 네 거나 먹어. 다 식겠다.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칼질을 시작하는 본드는 정장 차림이었다. 둘이서 격식을 차릴 때는 이미 한참을 지났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는 가끔 그런 옷을 입고 저를 만나러 왔다. 항상 아무렇게나 재킷을 걸치거나 니트 한 장을 입고 다니는 내 곁에서 당연히 제게 따라붙는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건지, 일류 요원이라더니 주목 병이라도 생긴 건가 싶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내 옷까지 사다 둔 것이었다. 침대 위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쓰리피스의 정장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다, 이번에는 무슨 속셈인가 싶어 한숨을 푹 쉬었다. 비비와 루시가 발치에서 몸을 부비며 야옹 울었다. 본드가 일어나면서 켜 두고 나갔는지 향초 불빛이 탁자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후 불어 끄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서 재단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할 만큼 꼭 맞았다.

 

“뭐, 됐어요.”

“응.”

“눈 온다.”

“……그러네.”

“식사는 마음에 들어요?”

“응…… 그런데 원래 손님이 이렇게 없었어?”

“통째로 빌렸어요.”

“……아.”

 

항상 유난이었다.

 

“식사하고 밖에서 좀 걸을까요?”

“추운데…….”

“영화라도?”

“영화는 무슨……. 집에 가서 보지 뭐. 나온 김에 고양이 모래랑 간식 사 가고…….”

 

그래요. 본드는 씩 웃었다. 그 때, 본드가 헬기를 타고 복귀했을 때. 크리스마스는 애초에 지나 있었지만 그와 데이트를 했었다. 바로 지금 이 레스토랑에서였다. 어울리지 않게 별 시덥잖은 감상에라도 젖었는지 본드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이 곳, 같은 창가 자리에 앉아 나와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가령 첫 해에는, 연애해요. 둘째 해에는, 우리 집을 합칠까요? 그 때마다 내가 모든 말에 승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또한 예를 들자면 첫 번째는 승낙, 두 번째는 거절이었다. 그 동안에는 그렇게 소원이라던 데이트를 하고 난 뒤에도 낯부끄러운 행동들―태너는 그것을 애정행각이라고 표현했지만―을 임무 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던 본드가 결국 M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카메라를 보고 윙크를 한다던가 하는 잡다한 습관들 때문이었다. 임무로 타겟과 잠자리를 갖거나 플러팅을 하고 나면 복귀하는 동안 내도록 내게 사과를 했다.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작 나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 생각하고 있었으나 본드에게는 약간 달랐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몇 번이나 그렇게 말해도 결국은 또 내 품에 선물상자를 한아름 안기고 온 얼굴에 열심히 침질을 해 댔다. 보고 싶었어요. 본드가 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는 데에는 나도 도가 텄다. 나를 제 품에 꼭 끌어안고 내 어깨에 턱을 기대는 본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나 역시 변해 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흰 갈기를 빗으로 빗겨 주거나, 높은 체온을 가진 본드의 몸에 소파처럼 기대어 랩탑을 두드리거나. 가끔은 그대로 사자 상태의 본드에게 기댄 채 잠이 들기도 했다. 사랑해요. 본드는 내 셔츠의 단추를 조심스럽게 풀고 그 속의 맨살에 입을 맞추면서 습관처럼 웅얼거렸다. 정말 사랑해요. 정말.

 

“줄 거 있어요.”

 

본드가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말투를 바꾸는 때를 알고 있었다. 내게 부탁할 거리가 생겼거나 불리한 처지에 있을 때면 이런 식으로 굴곤 했다. 임무 중에는 놀라울 정도로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으면서 내 앞에서는 금세 표정을 무너뜨렸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모양이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본드가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

 

대체 뭘 하려는 심산인가 싶어 내 바로 앞에 선 채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본드를 잠깐 올려보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니…… 왼손.”

 

어색하게 오른손을 무릎 위로 돌려놓고 쭈뼛거리며 왼손을 내밀자 본드는 픽 웃으며 내 왼손을 약간 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손을 쥔 채로 제 무릎 한 쪽을 꿇었다. 이건 왠지 로맨스 영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으로 또 멍해지려는 찰나 넷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본드는 반지를 끼운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여전히 돌처럼 굳어있는 내게 제 손을 보여주었다. 같은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똑같은 반지.

 

“데이트는 했으니까…….”

“어…… 응.”

“이제 결혼해요.”

“어…… 응?!”

 

임무도 제멋대로, 데이트도 제멋대로, 연애도 제멋대로, 그대로 두고 봤더니 이제는 프로포즈였다. 온 몸을 펄펄 끓는 물에 푹 담그기라도 한 것처럼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발갛게 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본드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싸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같이 살아. 사랑해요…… 퀜틴.”

 

본드의 등 뒤로 보이는 바깥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또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였다. 트리와 불빛. 본드가 몸을 일으켜 내 입술을 찾았다. 조심스럽게 본드의 등을 끌어안고 입술을 벌렸다. 나는 여전히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체온을 느끼며 생각했다. 잠갔다고 생각했던 겨울 문을 열고 들어온 여름날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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