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라스의 연인
니콜라스는 산타클로스의 정식 명칭이었다. 니콜라스는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 날, 전국을 돌며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니콜라스는 지리에 밝아야하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인품이 뛰어나야 했다. 지원 자격은 28세 이상의 신체 모두가 건강한 남자였으나, 시험이 어려운 만큼 대부분 40대가 넘어 니콜라스가 되었다. 그것도 천문학적인 경쟁률을 뚫고 단 한 명만이 그 영광을 누렸다.
26대 니콜라스의 은퇴 소식과 함께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아직 은퇴 연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후배 양성에 힘쓰기 위해 물러난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사람들은 그의 성품을 칭송하느라 바빴다. 자연스럽게 차기 니콜라스는 누가 될 것인가로 귀추가 주목되었다. 시민들은 데일 家가 명성을 회복하여 니콜라스를 배출한다, 와 새로운 가문들이 등장 한다 로 설전을 벌였다. 사실 데일 家의 지지자들이 더 많았다. 조상 대대로 니콜라스를 도맡았으니 ㅡ데일 家는 1~3대, 15~25대 니콜라스를 배출했다ㅡ 전통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설전이 오고가는 와중에, 에릭 데일 의원의 장남이자 데일 家 니콜라스 후보생 퀜틴 데일이 음주운전으로 가로수를 들이받은 사고가 났다. 조수석에는 소녀가 속옷이 다 보인 채로 엎드려 있었다. 평소에도 크고 작은 사고로 데일 가문에서 골칫덩어리였지만 이번 일은 가문에 끼친 파장이 컸다. 불량 가문이라는 오명은 물론이고 니콜라스 배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기에 대가는 더 가혹했다. 면허정지, 27대 니콜라스 후보생 탈락, 그리고 니콜라스 지원 자격 1회 박탈. 언론은 데일 가문 소식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은 스테파니 데일을 닮아 고운데 행동거지는 아주 방탕하다”라며 혀를 찼다. 모범생으로 가득 찬 데일 家의 돌연변이였다.
*
“데일. 너를 게이 클럽의 댄서로 보내기로 했다.”
“아버지 제발….”
“거기 가서 네가 좋아하는 섹스도 마음껏 하고 술도 먹고 싶은 대로 다 마시렴.”
퀜틴은 깁스 한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는데 꼭 다이아몬드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에릭은 거지꼴로 울어도 예쁜 아들이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패고 싶었지만 아내 스테파니를 닮은 얼굴에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런던에 아주 유명한 클럽이 있다더구나. 이런 번화가에 또 그런 음침한 곳이 있을 줄이야.”
“에릭. 세상은 빛과 그늘의 공존이에요.”
“당신은 언제나 우아하고 문학적이야…. 이런 고고한 귀족에게서 너 같은….”
에릭은 말하다말고 뒷목을 잡았다. 놀란 스테파니가 에릭을 부축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퀜틴은 눈물을 닦았다. 소파에 누워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사고 쳐도 니콜라스 일에는 영향이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운이 나빠도 아주 사납게 됐다. 니콜라스 핑계로 평탄하게 살던 자신의 삶에도 이번 일은 위기였다.
이 와중에도 TV에서는 26대 니콜라스의 훌륭한 행적을 읊고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파란 눈을 가진 그는 역대 니콜라스 중 가장 멋진 외모를 자랑한다고도 했다.
“니콜라스를 외모 보고 뽑나요?”
앵커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본드 家도 만만치 않은 명문 가문이지요. 그들은 무엇보다 신사처럼 아주 젠틀하다고 합니다.”
“그곳에 고용된 사람들도 매너가 장난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흠 잡을 게 없는 집이에요.”
26대 니콜라스의 사진이 화면을 채웠다. 퀜틴은 저도 모르게 바른 자세로 앉아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26대 니콜라스. James Bond. BOND사의 CEO 찰스 본드의 장남. 올해 45세로 미혼. 3년간의 니콜라스 활동을 마무리하고 은퇴. 활동 기간이 보통 7~10년인 점을 고려하면 제임스는 가장 빨리 그만 둔 것. 목표는 더 훌륭한 후배 양성.
니콜라스 후보생 사건의 의견을 묻는 M데일리 인터뷰.
[젊은 청년이 패기가 좋네요. 다시 태어나면 그런 삶도 괜찮겠어요.]
유머감각도 넘친다며, 인터뷰 후 좋은 여론이 형성.
“미친 놈. 재수 없어.”
그리고 퀜틴 데일의 제임스 본드에 대한 첫인상.
*
퀜틴은 처음으로, 살면서 기술 안 배우고 능력도 없는 것에 후회를 했다. 물론 퀜틴이 앉아서 좌절하기에 많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애매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타국의 속담이 있듯이, 젊은 CEO인 자신의 동생 조니 데일은 신동으로 불렸다.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국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미국식 영어의 발음까지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언어 말고도 여러 방면으로 뛰어났으니 어쨌든 걔도 퀜틴에게는 재수 없는 놈이었다. 퀜틴은 5살 때 단음절을 겨우 말할 수 있었고 모든 행동이 느렸다.
퀜틴은 10대 중반이 지나서야 제 나이에 맞는 성장을 하게 되었으나 그에 맞추어 격렬한 반항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의 더딘 성장을 눈치 주는 자신의 가문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터졌고, 그 반항기는 지금까지 방탕한 생활로 계속되고 있었다.
데일 家 눈엣가시인 퀜틴의 니콜라스 후보 등록은 유력한 후보였던 조니의 거부에 따른 일이었다. 조니는 태생이 냉정한 사업가, 속되게 말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이었다. 데일 가문에 재정 위기가 닥쳤을 때도 조니는 타고난 수완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니콜라스 후보에 퀜틴을 등록하는 게 어떻겠냐는 조니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긴 회의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드리고 27대 니콜라스 후보에 ‘퀜틴 데일’의 신청서를 넣었다.
퀜틴에게는 니콜라스 후보생 신분이 일종의 혜택으로 작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갖지 않았던 그는 난데없이 가문의 희망으로 추대 받은 사실에 적잖이 기분이 나빴지만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렸다.(물론 가문에서는 퀜틴이 적당히 나이를 먹으면 다른 인물에게 후보생 자리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몸도 다치고 쫓겨나게 생겼으니 퀜틴 32년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게 뻔했다.
“게이 클럽 댄서?”
퀜틴은 남자와는 한 번도 그런 짓은 안 해봤으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일자리를 갖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상적인 판단도 힘들었다.
*
“사람을 소개해줄게.”
“네 잘난 비서라면 사양한다.”
“데일. 제발 철 좀 들어.”
조니는 퀜틴을 사고뭉치 막냇동생처럼 여겼다. 제 형이 갖고 있는 거라곤 어머니를 쏙 빼닮아서 곱고 어려보이는 외모뿐이었다. 퀜틴은 얼굴만 믿고 능력 없이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니콜라스 후보생 자격도 박탈당했으니 앞길이 캄캄했다.
“내가 이 분을 모시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조니는 혀를 찼다. 자신의 여자친구 크리스티나가 아니었으면 퀜틴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 했을 터였다. 크리스티나는 퀜틴의 열혈 팬이었다. 소설 작가인 그녀가 퀜틴을 모델로 쓴 소설이 대박이 났을 때부터, 그녀는 그를 은인쯤으로 여겼다. 물론 긍정적인 소설은 아니었다. 정부 소속 요원 007이 남자를 잘못 만나 파멸한다는 굉장히 염세적인 내용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퀜틴을 이렇게 놔두면 안 된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게다가 그녀는 현재, 밑바닥 인생의 남자가 구원받는 소설을 구상 중이었다. (니콜라스 후보생으로 추천한 것도 그녀의 입김이 작용했다) 크리스티나는 퀜틴을 ‘구원’해줄 사람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렇게 나온 이야기가, 퀜틴에게 멘토를 심어주어 스스로 변화하게끔 하는 게 어떻겠느냐 이었다. 유능한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넓은 인맥을 동원하여 적합한 인물의 연락처를 얻어냈다. 조니는 그를 직접 방문까지 하고, 또 퀜틴의 사정을 설명하느라 얼마나 진땀 뺐던가.
“뭐 수상이라도 모신 줄 알겠네.”
“그 쯤 돼.”
“난 관심 없으니까 니들끼리 알아서 해.”
“제임스 본드 알지?”
“어디를 가나 제임스 본드 타령이야 거지같게….”
퀜틴의 투덜대는 모습에 조니는 혀를 차며 수트 한 벌을 건넸다. 이거 입고 그에게 가.
“뭐 몸 파는 거야?”
“아. 말 좀 고상하게 할 수 없겠어?”
“그걸 바라면 나를 고상하게 키웠어야지. 네가 나처럼 컸으면 더 심했을 거다.”
끝까지 말대구로 열 받게 하는 저의 형을 보면서 조니는 인내심을 다스려야했다. 크리스티나 아니었으면 상종도 안 했을 인간. 퀜틴은 도무지 제임스 본드를 만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당연했다. 살면서 약쟁이 아니면 여자나 만났을 것이니 그런 격 있는 신사를 대하는 게 어색할 테다. 조니는 할 수 없이 최후의 보루를 꺼냈다.
“네가 마약하는 거 우리 가족 다 알고 있어. 아버지가 조만간 널 신고하실 생각인 가봐.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든가 마약 센터에서 썩든가. 마음대로 해.”
“뭐? 야 잠깐 내 말 좀….”
퀜틴은 억울했다. 자신은 마약 중독자가 아니었다. 몸에 좋지 않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몇 번 하고 말았었다.
“아니면 본드를 만나든가.”
그러나 복용한 사실은 사실이었다. 철저히 을의 입장인 퀜틴에게 결정권은 없었다.
이리하여 퀜틴과 본드의 만남은 (강제로) 성사되었다. 퀜틴이 10대 이후로 처음 입어본 수트를 만지면서 도착한 본드 家의 저택은, 데일 家에 비하면 작았지만 만만치 않은 규모였다. 데일 家가 화려하고 웅장하다면 본드 家는 균형 잡힌 절제와 우아한 기풍으로 위엄을 드러냈다.
“일주일?”
“도련님. 두 달입니다.”
“알았어요. 2주.”
“도련님. 두 달입니다.”
“….”
집사는 퀜틴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두 달 후에 뵙겠습니다.
집사를 보내고 짐과 함께 남은 퀜틴은 끌려가는 심정으로 정원으로 들어섰다. 저택의 문은 열려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퀜틴은 코웃음을 쳤다. 거실로 보이는 공간 가운데에 물 뿜는 분수대가 있지를 않나 벽장에는 와인과 다양한 종류의 총들이 전시되어 있지를 않나, 게다가 두 전시물들이 한 곳에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조합이었다. 집 주인도 만만치 않은 정신병자일 것이라고 퀜틴은 추측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은 없다.
퀜틴이 1층에서 헤매는 동안 본드는 위층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억지로 입혀놓은 수트의 옷매무새는 엉망이었다. 본드는 총 옆에 선 퀜틴을 보며, 조니 데일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보통 망나니가 아니에요. 이 일에 협조해주시면 저는 아버님께서 하시는 사업과의 계약을 연장하겠습니다.”
“협박인가? 아버지 사업과 나는 관련이 없는데.”
“아…. 어, 제가 알기로 미스터께서는 더 나은 후배 양성을 위해서 은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데일이 미스터의 명성에도 도움이 될 게 분명합니다.”
사실 본드는 니콜라스 일이 힘들고 지겨워서 그만둔 거였다. 니콜라스 후보생으로 등록했을 때가 언제였던가. 비밀리에 운영한 카지노 사업에서 손을 막 뗀 후라 여유가 있었고, 이것저것 도전하는 모험심으로 충만했던 시기였다. 가볍게 니콜라스 고시를 응시했는데 덥석 붙을 줄이야. 하늘의 별 따기인 니콜라스. 본드에게는 별 거 없었다.
조니의 제안이 나쁘지는 않았다. 퀜틴 데일이라는 인물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의 탕아라는 특징이 남일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퀜틴 데일을 데리고 살아 달라.”
“아, 예. 그렇습니다.”
“내가 퀜틴을 어떻게 할 줄 알고 맡겨.”
“신뢰라고 할까요. 미스터에겐 단단한 신뢰가 느껴집니다.”
재빨리 답하는 임기응변이 사업가다웠다. 이런 동생의 형은 얼마나 최악이기에 난리인지, 본드는 의문이었다. 본드는 뉴스에서 본 퀜틴 데일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으나 기억이 너무 희미했다. 본드는 조니에게 물었다.
“예쁜가?”
“본드?”
그 때 낯선 목소리가 회상에 불쑥 끼어들었다. 본드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내려 봤다. 부루퉁한 얼굴로 저를 보는 남자는 수염으로 지저분했지만 안경 너머 초록색의 눈동자가 영롱했다. 깊이가 있었다.
“Q.”
“뭐요?”
“자네를 Q라고 부를게. 퀜틴 발음이 어려워서 말이야.”
막무가내인 말에 반박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퀜틴은 가만히 있었다. 게다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그냥 데일이라고, 성으로 부르세요.”
“왜?”
“아무도 제게 퀜틴으로 안 불러요. 저도 듣기 거북해요.”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황한 사람은 본드였다. 외동인 그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다룰 줄 몰랐다. 언제나 자신에게 숙이고 들어올 줄 아는 사람만 상대했기 때문에, 대놓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거다.
“그럼 나는 이름으로 부를래.”
“아. 그냥 데일이라고….”
“Q.”
“…특이하시네요. 큐도 아니고 왜 큐유우하고 발음해요.”
어지간히 트집 잡기를 좋아했다. 말 한마디에 대꾸하는 퀜틴의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본드는 입가를 만져 웃음을 참았다.
“일단 그 안 어울리는 수트부터 갈아입도록 해. 수염도 깎고 머리도 정리 하고. 4층으로 올라가면 자네 방이 있으니, 거기서 묵으면 될 거야.”
“본드 방은 어디인데요?”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발음이 특이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귀에 박힐 정도였다. 30대 초반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였다.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본드는 동안인 사람들을 싫어했다.
“2층.”
“저도 2층 할래요. 4층은 너무 멀군요.”
“웬만하면 말 좀 들으렴.”
“무슨 애 취급 하세요? 실례지만 미스터 나이가….”
“….”
가장 싫어하는 나이 얘기가 나오자 본드는 입을 다물었다. 내일 당장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퀜틴은 잠시 고민하더니 짝, 손뼉을 쳤다.
“60대는 아니었죠?”
“….”
퀜틴은 화가 난 얼굴인 본드를 두고 얼른 4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더 건드렸다가는 1층에 있는 총으로 쏠 분위기였다.
방문을 열자 본가의 방보다 더 큰 공간이 있었다. 퀜틴은 갑갑한 옷을 벗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몸은 말라서 볼 품 없었다. 매일 보던 몸인데도 본드를 떠올리니 더 초라하게 보였다. 본드도 수트를 입고 있었으나, 평생 그런 옷들만 취급했을 듯한, 자신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 대충 봐도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흔한 40대 아저씨 아우라는 아니었다.
“진짜 재수 없네.”
왜 아직까지 미혼인지 궁금했는데 만나보니 답이 나왔다. 여자가 너무 많아서 일거다.
퀜틴은 새 이불을 깔은 듯 깨끗한 침대에 누워서, 꼭 애칭처럼 들리는 알파벳을 읊조렸다. Q. 미친 거 아닌가. 여자라면 모를까 남자에게 그런 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나. 자신이 여자를 꾈 때에도 그런 멘트는 한 적 없었다.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친한 사람이 없어서, 밖에서는 가문의 후광을 받은 터라서 매일 데일로 살았다. 퀜틴으로 불리는 건 어색했다. 퀜틴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본드가 저를 내려다봤던 눈빛이 떠올랐다. 제가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본드는 달래려고 했다.
“Q. 갈아입으라고 했지 벗고 있으라곤 안 했어.”
“노크 하고 들어오시죠?”
퀜틴은 기척 없이 들어온 본드에 놀라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썼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피부에는 이불의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젠틀하네 어쩌네 하더니.”
“가문에 그런 사람 한 명씩은 있잖아. 안 어울리는 사람.”
본드는 눈을 굴려 버둥대는 퀜틴의 하얀 발을 쫓았다. 남자치고는 확실히 작았으며 흉터 하나 없었다. 덩치도 작더니 무엇 하나 큰 게 없는 놈이었다.
“나도 그랬어.”
“…공감하실 거면 혼자 하세요.”
“음. 참고했으면 하는 게 있어서.”
퀜틴이 이불 사이로 고개를 빼들었다.
“난 게이야.”
*
본드와 살게 되면서 퀜틴의 생활이 바빠졌다. 본드는 불규칙적인 생활습관의 퀜틴을 위해 시간표를 직접 짜주었다. 하루는 다음과 같았다.
8시 기상 본드와 아침 운동->9시 본드와 아침식사->10시 본드와 불어 등 외국어 수업->정오 본드와 점심식사->오후 2시 미술관, 연극 등 본드와 문화생활->오후 4시 본드와 봉사활동->오후 6시 본드와 저녁식사->저녁 7시 본드와 독서->밤 9시 본드와 하루 일과 기록 및 반성->밤 11시 잠자리
모든 게 별로인 계획이었지만 퀜틴이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은 잠자리를 제외하고 모두 본드가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사이도 아닌데 ㅡ게다가 본드는 커밍아웃까지 했다ㅡ 항시 붙어있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퀜틴은 계획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나가봤자 갈 곳도 없었다. 챙겨온 돈은 옷을 사는 데에 다 써버렸다. 수트를 강요하는 본드에 대한 작은 반항으로, 청바지나 남방 같은 옷들만 구매했더니 어느새 돈이 바닥났다. 퀜틴은 잔소리를 예상했으나, 본드는 20대 초반처럼 입고 있는 퀜틴을 잠깐 훑어볼 뿐 군말 않고 넘어갔다. 맥 빠진 건 오히려 퀜틴 쪽이었다.
퀜틴은 본드가 가자는 데로 따라갔고 이끄는 대로 대화했다. 물론 대화라고 해봤자, “Q, 연극 볼 땐 조용히 좀 하게.” “잘난 척 하지 마세요.” “이 작가는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야.” “독해는 독자가 하지 작가가 왜 하나요?” 와 같이 가시가 박혀 있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3주가 조금 지나자 퀜틴은 성격이 변하고 있었다. 훨씬 차분한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날이 서있던 껍질을 벗기니 온순한 본성이 튀어나왔다. 데일 家의 유전자는 유전자였다. 퀜틴은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빨랐다. 느린 성장에 실망한 가족들이 퀜틴의 잠재력을 밟았을 뿐이었다. 퀜틴은 자신이 고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않았다는 것에 창피함도 느꼈다. 할 수 있다면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이제는 본드와 평범한 대화를 했다. 예전처럼 헐뜯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인상이 바뀌고 있었다. 퀜틴은 본드, 잘 자요. 등의 일상적인 인사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본드는 그럴 때마다 눈 한쪽을 찡긋 감았다 떴다. 퀜틴은 느끼하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하면 꼭 그 행동이 생각났다. 얼굴이 뜨거워지니, 퀜틴은 잠을 자주 설쳤다.
둘은 레스토랑에서 저녁도 함께 했다. 와인 잔을 맞대고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집에 와서도 이어졌고 퀜틴은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본드의 등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언제나 여유로웠던 본드는 퀜틴의 스킨십에 크게 당황했다. 본드는 비틀거리는 퀜틴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퀜틴은 문에 기대어 작게 웃었다. 본드의 당황한 얼굴이 머리에서 둥둥 떠다니면서 술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그 날 밤에 자신 몰래 외출하는 본드를 보고 나자 잠이 깨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불처럼 타올랐다. 무슨 분노인지는 몰랐다. 그저 본드가 올 때까지 복도에 앉아 기다렸다. 본드는 동이 트고 나서야 들어왔다.
퀜틴은 숙취 핑계로 아침운동을 마음대로 생략했다. 운동복 차려입고 나온 본드는 큐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큐는 묵묵부답이었다.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퀜틴은 눈을 내리깔고 빵만 집어먹었다. 본드는 퀜틴이 이제 어떤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릴까 싶어서, 퀜틴이 좋아하는 스팸구이의 접시를 슬며시 밀었다.
“안 먹어요.”
“아니 구경하라고.”
진짜, 말 한 마디 안 져! 퀜틴은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내 개인 시간은 없어요?”
퀜틴은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본드는 물을 한 번 마시더니 퀜틴을 바라봤다. 잘생긴 푸른 눈이 온 몸을 꿰뚫는 듯해서 퀜틴은 저 시선을 싫어했다.
“갑자기 왜 그래. 잘 지냈지 않나.”
“마음대로 외출도 못 하는데 무슨.”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어. 그 때는 싫어도 개인 시간이 많으니까 참아.”
퀜틴은 분했다. 냉정하게 말하는 본드를, 할 수 있다면 포크로 퍽퍽 때리고 싶었다. 저 사람은 정이라는 게 없다. 게이라고 했으면서 자신에게 어떤 표현을 한 적도…. 퀜틴은 이상한 곳으로 빠지는 생각을 얼른 지웠다.
“유치원생 교육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래요? 이러면 저 집에 갈 거예요.”
틈만 나면 퀜틴은 집에 간다는 소리를 했다. 본드도 분했다. 저 사람은 정이라는 게 없다.
“가는 건 상관없는데 집에서 널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본드는 자기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본심과 다르게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에 좋지 않은 기억만 있는 퀜틴에게 분명한 말실수였다.
퀜틴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말끔한 얼굴이 빨개졌다가 하얘졌다.
“당신은 정말…재수 없어요.”
“앞으로 더 재수 없을 거야. 식사 마저 하지.”
입을 멈추고 싶었으나 한 번 잘못 나온 말은 계속 삐뚤어진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본드는 차라리 퀜틴이 자신의 뺨에 주먹이라도 날렸으면 했다.
“먼저 올라갈게요.”
최근 들어 평화로웠던 아침 식사는 난데없는 말다툼으로 깨지고 말았다.
처음 만났던 2월이 지나고 이제 3월의 봄이었지만 집안은 찬바람이 불었다. 필요한 대화 외에는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 식사시간은 포크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함께 있는 시간은 많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사이는 벌어져있었다.
퀜틴은 심각했다. 보름이 지나면 이곳을 떠나고 집으로 가야했다. 그 날 아침 투정 때문에 본드와는 아예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싫었던 본드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동행할 때마다 옆에 있던 본드는 이제 퀜틴보다 앞서서 걸었다. 언제나 그 단단한 뒷모습만 보여주어서, 퀜틴은 그 날 밤 그의 등을 만졌던 게 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끊기고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보름 만에 회복할 수 있는 관계라면 이미 돌아갔을 터. 퀜틴은 이대로 놔두기로 했다. 자신이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인정을 하고 나니 가슴이 쿡쿡 쑤셨다. 퀜틴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았던 퀜틴은 지금 깨달은 게 있었다.
*
조니가 작성한 계약서를 보면 퀜틴은 4월 1일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오늘은 3월 31일이었다.
본드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무거웠다. 며칠 전부터 기침하더니 기어코 몸살감기에 걸려버렸다. 화창한 날씨에 감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본드는 바로 퀜틴 생각을 했다. 지금 자고 있을 테다. 본드는 가장 먼저 퀜틴을 떠올리고 하루를 시작한다. 가정부 디올 부인에게 퀜틴의 상태를 묻고 메뉴를 주문한다. 며칠 전에 버섯으로 만든 음식을 퀜틴이 남긴 것을 보고 다시 상에 들이지 않도록 했다. 본드는 퀜틴이 모르는 곳에서 언제나 배려하고 있었다. 물론 퀜틴은 본드의 행동을 몰랐다. 그러나 구태여 내 배려를 알아달라고 할 마음은 없었다. 이건, 먼저 반하는 사람이 지는 거였다. 본드는 이 나이에 짝사랑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본드는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옷장에서 수트를 꺼내 입었다.
디올 부인은 2층으로 올라가며 본드의 무정함을 탓했다. 내일이면 퀜틴이 떠나는데도 자칭 신사라는 사람은 준비한 게 없었다.
사실 집안 고용인들은 본드와 퀜틴이 서로 미묘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퀜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본드와,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본드를 힐끗 보다가 혼자 볼이 붉어지는 퀜틴. 런던 최고의 게이클럽 VIP이었던 본드는 퀜틴의 얼굴만 바라봐도 배가 부른지 완전히 그곳에 발길을 끊었다. 속내를 감추며 의미 모를 미소만 짓던 그의 입술은 이제 퀜틴을 생각하며 웃었다. 본드를 오랜 기간 봐온 디올은 한 사람으로 인해 남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이 좋아서 난리였으나 어느 날 아침에 말다툼을 하더니, 이제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이 속 좁은 남자 두 명은 화해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자존심을 세웠다. 어린 애들만도 못 했다.
퀜틴이 처음 온 날 본드는 퀜틴 데일을 교육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디올과 고용인들은 퀜틴을 언론으로만 접했기 때문에 그의 방탕함이 극에 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퀜틴은 훨씬 괜찮은 남자였다. 그를 억압하고 무시하는 환경이 퀜틴을 어긋나게 만들었을 뿐 어려보이는 외모처럼 본성은 순수했다. 퀜틴의 몸짓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있었다. 퀜틴이 웃으면 디올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제 둘이 마음만 확인하면 되었다. 매일 퀜틴의 안부를 묻는 소심한 남자 제임스 본드의 짝사랑이 안타까워서라도 자신 같은 중재인이 나서야 했다. 디올은 본드의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도련…님?”
조용한 방에 불안해진 디올은 얼른 문을 열었다. 말끔히 이불을 갠 침대에는 본드가 없었다.
본드는 처방받은 약봉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링거를 맞으니 몸이 훨씬 가뿐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퀜틴이 보는 앞에서 누워 골골대는 것보다는 나았다. 본드는 마스크를 쓰며 혼잣말을 했다.
“아쉽지만 Q와 멀리 있어야겠군.”
본드는 보석 가게에서 미리 주문한 반지를 수령했다. 퀜틴의 눈동자 색을 닮은 에메랄드 반지였다. 속에는 ‘Q’라고 이니셜도 새겼다. 비록 사이는 소원해졌으나, 디올을 통해 반지를 전해 받을 퀜틴이 기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드가 핸들을 잡자마자 그의 눈이 슬슬 감겼다. 약기운이 올라왔다. 본드는 잠깐 자다가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본드는 디올에게 늦을 수도 있다고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약봉지와 반지 케이스뿐이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온 것이다. 디올이 걱정할 테지만 지금 상태로는 운전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본드는 좌석을 뒤로 뺀 후 잠을 청했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깊이 잠들어 버렸는지, 본드가 눈을 뜨자 벌써 오후 두시가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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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
본드의 차가 주차장으로 진입하자 현관에서 퀜틴이 뛰쳐나왔다. 본드는 드디어 저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퀜틴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부피가 커진 감정을 감추기 힘들었다.
“대체 연락도 없이…. 마스크는 왜 썼어요?”
퀜틴이 본드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본드는 뒤로 물러섰다. 감기가 지독해서 퀜틴이 걸리면 큰일이었다. 이런 속뜻을 모르는 퀜틴의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 놀란 본드가 다시 퀜틴의 팔을 잡았지만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피했다.
“Q.”
“집안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있어요. 예전에 말도 없이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면서요.”
20대 때의 일이었다. 퀜틴처럼 반항으로 가득 찼던 시절에,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는 남자와 다른 남자와의 치정싸움에 휘말려 칼에 찔렸던 적이 있었다. 그 오래된 일을 디올이 기어코 꺼낸 모양이었다.
“다 옛날이야. 별 일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Q,”
“들어와서 식사하세요. 오늘 계획은 다 캔슬했어요.”
“무슨 말이지?”
본드가 물었다. 퀜틴은 뒤돌아서 걷더니 현관문을 잡았다.
“교육 끝났잖아요. 저는 내일 집으로 가야하니 짐도 챙겨야 하구요.”
“분명 계약은 오늘까지야. 다시 일정 맞추도록 하지.”
“언제부터 그렇게 원리원칙에 맞게 살았어요?”
본드가 퀜틴을 돌려세웠다. 퀜틴의 눈이 빨갰다.
“그 날 좋았어요?”
퀜틴은 본드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노려봤다. 본드는 퀜틴이 자신에 대한 어떤 모습을 들었는지 불안했다. 지금이야 개과천선하여 좋은 평을 듣고 살지만 20년 전만 해도 퀜틴보다 더한 망나니였다. 비아냥거림이 퀜틴을 망쳐놓았다면 본드는 부담스러운 기대가 그를 죽였다. 어린 시절 내내 예법에 조금만 어긋나도 매질을 감당해야했던 그였다. 본드는 신사의 길을 걸음과 동시에 뒷길로 새는 법을 터득했다.
퀜틴을 보면 저를 보는 듯 했다.
“대체 어떤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한테는 신사인 척 깨끗한 척 다 해놓고. 뒤에서는 별 짓을 다 했던데요. 제임스 본드.”
“….”
“니콜라스는 쉽게 남자를 안을 수 있는 자리인가 봅니다.”
퀜틴의 눈이 흔들렸다. 본드는 그제야 퀜틴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퀜틴이 저의 등을 만졌던 날 밤, 본드는 오랜만에 외출하여 남자를 안았다. 어떻게 해서든 불어난 성욕을 해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퀜틴을 억지로 안을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퀜틴을 잃을 수 없었다. 본드에게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Q.”
“그만 불러요. 역겨워요.”
퀜틴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한참 현관에 서 있던 본드도 문을 열었다. 디올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본드는 디올에게 웃어 보인 후 숨을 가다듬었다.
“밥 먹었어요?”
본드는 퀜틴을 말하고 있었다.
“안 드셨어요. 예전에 도련님께서 칼에 찔리셨던 일을 말씀드리니까 계속 현관에 서 계셨었어요.”
“그렇군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디올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데일 군이 자꾸 그 날 밤 도련님 외출을 물어보셔서….”
“괜찮아요.”
숨기고 싶었지만 이미 드러난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본드는 기뻐하고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질투였다. 본드의 실상에 실망한 게 아니라 다른 남자와 있었다는 사실에 질투 하는 거였다. 지금 자신이 마음대로 판단했는지 몰라도 일단은 부딪혀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본드는 절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다. 퀜틴은 이성애자이며, 설사 취향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다 늙은 자신을 볼 리는 없었으니. 그러나 퀜틴의 울 것처럼 빨간 눈은 본드에게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본드는 마스크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퀜틴의 방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계단이 더 많았다. 얇은 다리로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다음에는 2층에서 같이 지낼까. 본드는 주머니 속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언제나 들어가고 싶었던 그 문 앞에 도착했다. 퀜틴이 오해를 풀고 내 사과를 받아줬으면 좋겠다. 본드는 처음 느끼는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두어 번 노크하니 퀜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디올, 저…. 본드?”
“할 말이 있어.”
“나가줘요.”
“그럼 이것만 받아줘.”
눈이 퉁퉁 부은 퀜틴은 평소보다 더 귀여웠다. 당장 입을 맞추고 싶었다. 본드는 입 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이 상황에서 웃으면 큰일이었다.
“….”
“반지야. 물론 Q의 것 밖에 없어. 커플링이 아니니까.”
에메랄드가 에메랄드를 보고 있었다.
“그 날 밤은 미안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를 안을 것 같았어.”
“….”
퀜틴의 눈이 빛났다.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내일 네가 떠나니까 속 편하게 말할게. 나는 지금도 너를 만지고 키스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어.”
본능에 충실한 본드의 말에 퀜틴은 인상을 찌푸리다 피식 웃었다. 본드는 그 와중에도 감격에 젖어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노골적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부끄러워해도 되나, 아니면 본디 이렇게 수줍은 성격인가.
“Q. 원래 취하면 막 다른 사람 만지고 그래?”
“…아니요.”
퀜틴은 고개를 숙였다. 한숨을 쉬더니 본드를 노려봤다. 이제 거기 안 다니죠? 퀜틴이 물었다. 본드는 웃음을 참았다.
“Q보다 다 못생겼는데 왜 가겠어.”
본드의 말에 퀜틴은 눈을 감고 손등을 내밀었다.
“끼우기나 해요.”
본드는 그제야 웃었다. 입술 끝이 사정없이 올라갔다.
“나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나.”
본드는 다시 마스크를 쓰고 퀜틴에게 다가갔다. 퀜틴은 한 쪽 눈을 떠 본드와 사이에 두고 있던 캐리어를 침대 밑으로 밀었다. 내가 감기에 걸려서. 본드는 양해를 구했다. 퀜틴의 입술과 본드의 마스크가 닿았다. 뜨거웠다. 퀜틴의 손가락에 반지가 들어갔다. 퀜틴은 본드의 마스크에 대고 속삭였다.
“똑같은 디자인으로, 사파이어 반지도 준비해요.”
*
중소기업 사장 말로리가 28대 니콜라스로 선발되었다. 27대 고시에서 아깝게 떨어진 아픔이 있는 그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말로리는 역대 니콜라스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게 성실히 임할 것을 다짐했다. TV에서는 말로리의 오열 장면을 연이어 방송하며 니콜라스의 여린 감성을 칭찬했다.
“본드! 그거 먹는 거 아니야!”
퀜틴이 본드에게서 장난감을 뺏었다. 본드는 야옹 울었다. 그 옆에서 자고 있던 큐를 괜히 툭툭 치다가, 퀜틴의 손을 피해 거실로 도망갔다. 퀜틴이 한숨을 쉬며 일어서자 굵은 팔이 퀜틴을 잡아끌었다.
“추우니까 이리와.”
“큐는 영리한데 본드는 왜 저럴까요.”
“…Q. 얘네 이름 좀 바꿀 수 없겠어?”
“아직도 그 소리.”
퀜틴이 본드의 입가에 검지를 대며 본드의 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네 개의 다리가 얽혔다. 본드는 퀜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다.
“조니가 목도리를 보내왔어요.”
“그놈은 몇 년째 목도리군. 앞으로는 반송해버려.”
“내가 니콜라스 후보생에 등록하지 않았다고, 나름 분노의 표현인가 봐요. 나 이번부터 지원 자격이거든요.”
본드는 고개를 저으며 퀜틴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하지 마. 그거. 괜히 힘들기만 하고 누가 너 납치할 수도 있어.”
또 헛소리…. 퀜틴이 본드의 팔목에 입술을 대고 작게 웃었다.
“우리 크리스마스에 뭐할 거예요?”
“아마…섹스.”
“동물이에요? 올해에는 좀 생산적인 것 하자구요.”
퀜틴이 지겹다는 듯 본드의 손을 찰싹 때렸다.
“그렇다면…섹스.”
“아 진짜!”
퀜틴은 화난 표정을 했다.
“좋아요.”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크리스티나의 신간이 나왔다. 퀜틴은 집으로 가는 길에 서점을 들렸다. 많은 책들 중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는 표지가 눈에 띄었다. 작가는 크리스티나 데일이었다. 표지 글씨 역시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휘황찬란하게 칠해놓았다. 제목은 <니콜라스의 연인>이라. 퀜틴이 크리스티나에게 <Q의 아내>이나 <Q에게 지는 남자>로 강력히 주장했으나 그녀는 기어코 처음 결정대로 밀고 나갔다. 상업적인 로맨스 책 같으며 무엇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었다.
“그래도….”
우리 이야기인데 재미는 있겠지. 퀜틴은 웃으며 책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