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ee star
제임스는 한번도 가족을 꿈꾸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외로움은 더 이상 두터운 외피를 뚫지 못한 지 오래였다. 그에게 가족은 화목함의 상징이 절대 아니었으나, 어쩌면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으로 자신만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시기만 되면 귓가를 맴돌던 소음이 캐럴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별 의미도 없던 낯선 음율이, 어느 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시에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 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몇 달 전부터 주문한 전나무 꼭대기에 별을 올려놓다가 칭얼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아리아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봤다. 별은 시시한 전나무 따위가 아닌, 제임스를 빼닮은 투명한 푸른 눈동자 속에 있었다. 결혼을 한 이래 느꼈던 중에 가장 커다란 만족감이 뱃속에서 꿈틀대며 올라와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부엌에서 희미한 그을음과 함께 토막 난 칠면조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오던 마리가 그를 불렀다. 그 무렵 마리는 지미라는 애칭으로 그를 불렀다. 끔찍한 애칭이라 생각하면서도 몇 년인가는 묵묵히 참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무렵의 제임스는 지미가 되어줄 수 있었으니까. 마리는 몇 개의 접시를 제임스에게 건네고, 마지막 사과 파이를 직접 식탁보 위에 조심스레 얹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리아나를 안아들고 창 밖에서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잠시 침묵에 빠졌다. 제임스는 마리의 곁에 서서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흔히 말하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을 제임스는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아직은 제 아버지의 단점을 모르는 아리아나가 그 앞에서 스스럼 없이 웃었던, 마리가 그에게 진저리 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게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
눈이 내린 건 오전부터였다. 하나씩 떨어지던 눈송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소복히 쌓이더니, 이젠 제법 눈앞을 가릴 만큼 펑펑 내렸다. 시계탑 위에 걸쳐진 해는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수업을 마치고 본관으로 향하던 제임스는 학교 안에 남은 이들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방학이 시작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난 참이라, 딱히 돌아갈 곳 없는 이들만이 한둘 눈에 띌 뿐이었다.
제임스 본드― 명패가 붙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처음으로 맞이한 건 적막한 냉기였다. 조교수의 이름을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방학이 시작한 첫날에 떠났을 터였다. 윤기가 도는 마호가니 책상 위에 서류가방을 두고,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동안에도 고요함은 지속됐다. 같은 층을 쓰는 사람들은 이미 모두 그리운 샤이어로 돌아간 듯했다. 제임스도 몇 가지 사소한 서류만 아니었다면 학교에 나올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내년이면 학교를 떠날 몇몇 학생들을 위한 추천서는 한두 시간이면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밑바닥에 깔아 둔 몇 장의 서류는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어쩌면 방학을 몽땅 투자해도 처리하기 힘든 절차일지도 몰랐다. 특히 맨 뒷장의 빈 칸은 그에게 오래 전 어느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했다.
"교수님, 제가 방해했나요?"
서류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제임스는 고개를 들어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머리의 청년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입술을 맴도는 청년의 이름을 잠시 헤매이다 도로 삼켰다.
"눈치도 못 챘으니 방해랄 것도 없지."
"계실 줄 알았어요. 창문에 불이 켜져 있어서."
머뭇대며 책상을 향해 다가오는 얼굴은 햇빛을 많이 보지 않는 탓인지 창백했다. 얼굴에 비해 커다란 뿔테 안경을 간신히 코에 걸친 채였다. 청년은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겉옷을 벗어 손님용 의자에 벗어두었다. 셔츠 위에 걸친 검은 가디건 덕분에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꽤 큰 키에 비해 마른 체구로 보였다. 쉽게 휘청일 듯 불안정한 기색은 육체만이 아니었다.
"제 이름은……."
"앉지, 데일 군. 적어도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의 이름은 외우고 있으니."
보통은 큐라고 부릅니다.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라서요.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미소는 수줍어서 적당한 호감을 주는 데 효과적이었다. 몇 번인가 학생들 사이에서 큐라고 불리는 걸 들은 적 있었지만,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벼운 발음으로 불리기엔 청년은 세상과 단절된 듯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도 제임스는 그를 큐라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부른 적 없었다. 수업 시간에 지칭하는 호칭은 성을 부르는 걸로도 충분했다. 큐는 제임스가 가리킨 맞은 편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다. 마치 상담이라도 하러 온듯한 분위기였지만, 아무것도 전해 들은 바 없었던 제임스는 무표정 속에 당황스런 기색을 숨겼다.
"무슨… 부탁을 하러 왔나?"
말을 하면서도 제임스는 이상한 예감을 감지했다. 큐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그룹의 일원 중 하나였다. 한 번도 자신에게 상담이나 질문을 하러 오진 않았지만 상위권에서 떨어진 적 없었고, 이번 학기에도 최고의 성적을 받을 예정이었다. 한적한 시간에 점수를 더 받기 위해 교수를 찾아올 타입은 전혀 아니였다.
"부탁하러 온 게 아니예요."
책상 위를 초조하게 두드리던 손가락을 들어 셔츠의 윗 단추를 하나 풀어내며 청년이 내뱉듯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임에도 귓가에 또렷하게 와닿는 발음이었다. 나른하고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그 목소리를 언젠가 들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고백을 하러 왔습니다."
*
한창 햇볕이 내리쬐던 날이었다. 남문의 카페테리아는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가볍게 끼니를 때우려는 교직원들이나 공강 시간에 모여 대화를 나누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학장실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커피를 한 잔 주문한 뒤에야 시계를 보고 조금 서둘러야 한다는 걸 알았다. 수업은 없었지만 상담을 기다리는 학생이 있었다. 제임스는 항상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편을 선호했다. 늘 제시간에 수업에 나타나는 그를 학생들은 '군인'이라 불렀다. 좋은 뜻도, 나쁜 뜻도 포함되어 있는 별명이었다. 처음에 마리는 성실하다는 증거라 자랑스러워 했지만, 곧 기계처럼 딱딱하다고 불평을 늘어 놓곤 했다.
커피는 생각처럼 빨리 나오지 않았다. 앞의 주문이 밀려 죄송하다는 직원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제임스는 만사에 호오를 느끼는 데 둔감했다. 어차피 그의 생각처럼 이루어지는 게 거의 없었기에 포기는 빠른 편이었다. 컵홀더라도 먼저 챙겨두던 참이었다.
"넌 진저리나게 형편없어. 그래서 그게 들킬까 무서워서 허세 부리는 거야."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비난처럼 들렸지만, 어쩌면 칭송하는 듯 기묘한 리듬감이 서린 말투였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곱슬머리가 눈에 띄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구석의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제각각 다른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험상궂은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몇몇이 손을 저으며 말렸지만, 그에게 반박당한 금발의 청년이 벌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너야말로 그렇겠지! 넌 누구든 갉아 먹고 망쳐버리고 마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빛이 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야. "
그게 너는 아니지만. 덧붙이는 말과 함께 태연하게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는 얼굴에 서린 미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작년 겨울, 자신을 찾아와 입술을 깨물던 초조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지만, 냅킨을 챙기는 척 잠시 머물러 그를 훔쳐보았다. 나중에서야 제임스는 그 미소가 자신이 자주 거울에서 보아왔던 것과 같은 종류란 걸 깨달았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
"교수님을 처음 본 순간 들었던 생각이 뭔지 아세요? 딱 한 번만, 자 보고 싶다."
"……."
"물론 그러고 나서 철저히 비밀로 해드릴 수도 있어요."
미동 없이 제임스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더니 간신히 입술을 비틀어 열어 대답했다.
"시덥지 않은 농담에 응하는 게 교수의 의무는 아니니 거부하지."
불쑥 찾아와 고백을 해대는 게 두 번째였다. 시기마저도 여전히 그가 학생을 상대할 의무가 없는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이었다. 작년에 순순히 큐가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앞으로는 그를 보기가 조금 껄끄럽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학기에도 큐는 제임스의 수업을 들었고 학생으로서의 태도 또한 훌륭했다. 교수와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는 대화는 일절 없었다. 가끔은 그날의 대화가 꿈이었단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잘된 일인지는 제임스 자신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늘 밤, 작년과 비슷한 옷차림에 큐가 문 너머에 서 있을 때까지는 이미 그런 일조차 잊었던 참이었다.
의자까지 가는 동안 그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발자국 소리마저도. 제임스는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자신을 방문한 게 아닌가란 농담을 떠올렸다. 하지만 진짜 농담은 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아리아나에게 교수님과 잤다고 말할 거예요."
아리아나의 이름이 나오자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으로 책상을 짚고 몸을 숙였다.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탓에 연한 초록빛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지금 협박하는 겐가?"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아리아나가 끔찍히 싫어하는 아버지와 제법 똑똑하다고 알려진 친구 중 누구 말을 믿을지는 자문해 보세요."
"…친구? 그 애는 여기 살지 않아."
"몇 달간 메일을 주고 받은 친구죠. 직접 만난 적도 있고… 당신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일부러 가장 멀리 있는 브라운대에 진학했다는 것도 압니다. ……아, 마지막 말은 죄송해요."
우물거리는 입술은 수줍었지만 담긴 말은 날이 서린 비수와 같았다. 오히려 제임스는 담담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예견된 재해가 드디어 불어닥친 기분이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말했잖아요. 당신과 자고 싶다고."
"단지 그것 때문에 내 딸을 걸고 날 협박하는 건가?"
"이런 말까진 참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네요."
마치 요리가 잘 안 되네요, 와 같은 말을 하는 톤으로 청년은 사과했다. 진심으로 미안한 눈치였다. 제임스는 점점 이게 현실인지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더라도 다들 상관없다고 생각할걸요. 추문 그 자체가 당신을 망칠 테니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첫 인상은 수줍은 홍안의 청년이었다. 제법 큰 키와 체구였지만 어딘가 불안정한 구석이 청년을 더욱 어리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가 꽤 인기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간간히 학생들과의 상담에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고, 절친한 관계는 없었지만 제법 많은 이들이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간혹 지나치게 상대를 오래 응시하는 버릇이 있어, 저에 대한 호감이라 착각하는 이도 많았다.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체스를 잘 두었으며, 방학에도 집에 거의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이는 거의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들은 정보였지만, 가끔은 제임스가 원치 않게 알게 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제임스."
그가 처음으로 제임스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타인에게서 수없이 불려졌던 이름인데도, 그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자신의 이름은 참으로 생경했다. 조급하게 다가온 입술과는 다르게, 느리고 가벼운 키스였다. 마치 깃털처럼 살풋 와닿는 느낌에 움찔 움츠려들었다. 부서지기 쉬운 무언가가 입술 속에 숨어 있어, 명령이라도 받은 마냥 제임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면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두 눈을 꼭 감은 큐가 상대의 넥타이를 한 손으로 붙잡고 더욱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바싹 다가온 입술을 위아래로 비비다가 약간의 틈을 찾았다. 달뜬 호흡을 내뱉은 큐가 묵묵히 다물린 제임스의 아랫 입술을 조금씩 물었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 좋아서 제임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가득 쌓인 눈을 처음으로 밟는 촉감과도 비슷했다. 꽤 긴 시간이었다. 혹은 눈 깜박할 찰나 같기도 했다. 산뜻한 내음이 훅 끼치더니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의 눈앞에 멈춰 있었다. 코 끝을 감도는 게 어떤 로션의 향기인지 제임스는 궁금해졌다. 흔히 남자들이 바르는 코롱이나 애프터쉐이브의 냄새는 아니었다.
"당신도 봤잖아요."
제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가 말했다.
"그때 나를 보고 있었잖아요."
*
청년은 달을 보고 있었다. 만년필의 뚜껑을 닫으며 제임스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저 파티에서 술에 취해 산책을 나온 줄로만 알았다. 중앙정원은 사방으로 입구가 나 있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밤새 내린 눈에 하얗게 뒤덮인 정원은 아무도 건들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달빛 아래 드리워진 풍경을 독점하는 행운을 누린 건 잠시였다.
처음 눈에 띄인 건 흐트러진 고수머리였다. 창문 밑에서 나타나 정원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휘청이는 실루엣이 전부 드러날 때까지 제임스는 눈을 떼지 않았다.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간이니 이 건물이 아닌, 기숙사에서부터 걸어왔음이 틀림없었다. 눈길을 헤치며 길을 만들던 청년은 잠시 멈춰 발치에 무언가를 두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세히 보니 창백한 두 발로 새하얀 눈을 밟고 있었다. 어떤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져 제임스는 괜히 손등을 한번 쓸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위치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인 청년은 몇 분 뒤엔가 불쑥 하늘로 얼굴을 치켜들었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정원의 눈을 비추던 달빛이 그의 이목구비 사이로 흘러 들어가 기묘한 음영을 자아냈다. 안경을 쓰지 않고 있어 얼굴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평소보다 더욱 그의 어깨가 휘청이는 듯했다. 어렵지 않게 제임스는 오래 전 크리스마스에 트리로 만들었던 전나무를 떠올렸다. 곧게 세워진 중심의 끝에는 언제나 별이 빛나고 있었다. 문득 올해 역시 큐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예감이 들었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영원히 방해받지 않을 듯하던 정적은 생각보다 일찍 깨어졌는데, 어느샌가 뛰쳐 나온 한 남자가 그의 등을 훌쩍 밀어 넘어뜨린 탓이었다. 소리도 없이 눈 속에 엎어진 그가 움직이지 않자, 남자는 어깨를 붙잡아 일으키려 들었다. 그러자 그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낄낄 웃더니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켜 기숙사 쪽을 향해 달려갔다. 멍하니 서 있던 남자가 곧 그의 뒤를 따르는 것까지 본 제임스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이미 사무실 안의 공기는 차가워진 지 오래였다.
*
"그래서 고백한답시고 내 딸을 이용하려 든 건가?"
"맞아요."
확신에 가까웠던 예감이 맞아떨어지자 오히려 제임스는 당혹감을 느꼈다. 아리아나를 들먹이며 압박하던 청년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대로 일어서서 떠나버렸지만, 그해 크리스마스 기간 내내 제임스는 그를 종종 떠올렸다. 그리고 연휴의 마지막 날에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일종의 의식이었다.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혼자만의 의식. 문득 만년필로 사인을 하면서 느꼈던 서걱대던 감촉이 큐를 보자 다시금 떠올랐다.
"겁쟁이군."
"그것도 맞아요."
적어도 그는 솔직하다고, 제임스는 생각했다. 솔직함은 제임스가 가장 좋아하는 미덕이었다.
"그래서 참아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제 말투가 상스럽다면 교정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어차피 변하지 않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은 무례한가요?"
"아니, 진실이라면 꾸며서 말할 필요가 없지."
"전 겁이 많아서 숨기는 게 있으면 불편하거든요. 끝까지 당신이 결국 거부한다면 난 죽을지도 모르죠."
"거짓말 마."
"네, 거짓말이에요."
큐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가 진심인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제임스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제임스에 대해 스스로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가족조차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인 건지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눈을 들어 젊은 제자를 마주했다.
"당신을 원해요."
"삼 년째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나?"
"난 기억력이 좋아요. 쉽게 잊는 법이 없죠."
"곧 학교를 졸업하는데 내년에도 이럴 참인가? 더 이상 내 학생도 아닐 텐데."
"졸업생의 모교 방문을 불허하는 학교는 세상에 없어요. 어차피 당신은 오늘 같은 날이면 항상 여기 있을 거잖아요.……사실은 내내 기다린 거 아닌가 하고 내가 착각할 수 들게끔."
그리고는 웃었다. 힘없고 마른 웃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처음 찾아온 날을 떠올렸다. 과거는 자꾸만 쌓여만 갔기에, 그중에서도 도통 떠오르는 건 많지 않았다. 다만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초록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타인에게 솔직하고, 스스로에게는 지나치게 솔직한. 그래서 담아두지 못하고 모두 쏟아내고,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지만 결국은 다시금 되풀이 하고야 마는 고장난 면이 있었다. 제임스는 그게 싫지 않았다.
"제임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아주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한때 마리가, 또는 그 이전에 몇몇의 사람들이 해주었던.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토록 또렷하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 보자 제게는 그림자만 남은 싱그러운 젊음을 느껴졌다. 침착한 기색이었으나 항상 그러했듯이 주의깊게 살펴보자, 흔들리는 눈망울 속에서 희미한 긴장감이 읽혔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제임스는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정확히 알면 좋을 텐데. 적어도 바보 같은 표정은 아니겠지. 소리 지르고, 증오하고, 서로를 갈갈이 찢다 못해 이를 드러내던 시절에 마리는 제임스에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난 아직도 당신을 몰라. 몇 년을 살아도 결국 당신이 내게 준 거라곤 빈 껍데기 뿐이야. 당신 속에 숨어있는 구멍을 볼 때마다 끝없는 구덩이에 갇힌 것처럼 갑갑해져.
그러나 제임스는 대답해줄 수 없었다. 스스로도 그 구멍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지만,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는 배운 적 없었다. 제임스는 마리가, 그리고 아리아나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지만 그들은 단지 관심을 바랄 뿐이었다. 심지어 제임스는 그들이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 병들었다는 가장 큰 증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했었다. 그저 감정을 드러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런 노력도 희생도 없이 감내하도록 방관했다. 간혹 제임스는 그런 자신을 혐오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미안하다고 여기는 것조차 기만 같아서, 곧 잊어버리곤 했다.
*
"나를 좋아하나?"
예상 외의 수를 받은 체스 선수처럼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 번만 자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문장이었나요?"
"자네는 내내 애인도 없었잖나. 수업할 땐 가장 먼저 오고, 가장 늦게 강의실을 나가지. 친구는 있겠지만 밤 늦게까지 어울리는 건 본 적 없어. 그런데 이렇게 끈질기게 도전한다는 게 의미하는 건 딱 하나야."
"……."
"절실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는 표현하고 싶지 않은데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당신이 거절하면 나는 상처를 받을 테니까. 그 말을 비록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젊었으므로,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받은 적이 없었으므로, 모든 걸 걸고 뛰어들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위악을 뒤집어 쓰는 편을 택했다. 설령 거절을 당하더라도 그저 치기 어린 호기심으로 포장할 수 있는 안전망이 필요했기에. 그것을 탓하고 싶진 않았다. 제임스 역시 언젠가 그런 이유로 누군가를 선택하고 상처를 주었으니.
눈앞의 청년은 젊고 아름다웠다. 지난 날의 기억들처럼, 찬란히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아직 자격이 남아 있다고 믿고 싶을 만큼 빛났다. 그는 자신을 협박한 치기 어린 제자에 불과했으나, 누구보다 순수했다. 오직 제 자신을 불태울 욕망에 눈이 멀어 덤벼드는 모습이 아름다워 그런 열병을 한번도 앓아본 적 없었던 제임스는 눈이 멀었다. 그렇기에 그 다음에 튀어나온 행동은 즉흥적 선택의 연장선이었다.
매년 나타나 협박을 일삼은 입술은 이년 전 겨울처럼 부드럽고 차가웠다. 여전히 큐의 목덜미에선 산뜻한 향기가 풍겼다. 제임스에게도 묻어나 둘은 같은 향을 지니게 될 터였다. 바들대며 떠는 입술을 조심스레 물자 그가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핥아 올라가며 점점 입술을 벌려 그 속을 탐했다. 차츰 가빠지는 호흡만이 시간을 짐작케 했다. 마침내 항복을 선언한 건 더 솔직한 쪽이었다.
"이게 진짜 키스라는 거지. 그동안 연습도 제대로 안 했나?"
"…나도 키스 정돈 잘 알아요."
숨을 몰아쉬던 큐가 더욱 하얗게 질린 얼굴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자넨 정말 괴짜야.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그게 남들보다 비효율적이란 증거는 아니죠."
"요는 좀 더 평범하게 의견을 전하라는 거네. 다음부터 데이트 신청을 할 때는 예의를 지켜서 시간이 있냐고 물어보도록."
하지만 그랬다면 과연 자신이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자신을 협박하고, 무례하게 대하며 욕망했다. 하지만 제임스도 그렇지 않았던가. 애나가 눈물을 흘리며 떠나달라고 소리치게 만들던, 진저리를 치던 아리아나가 외면한 자신도 그와 달랐던가. 종류는 다르지만 병든 것들의 공통된 징후였다. 제임스는 그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오로지 순수하게 목표만을 위해 달려온, 이 거짓말쟁이 청년이 혹 괴물일지라도 기꺼이 키스해줄 정도로. 그건 언젠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그를 보며 예감했던 일이기도 했다.
"오늘부터 난 크리스마스 휴가야."
"알아요."
안경을 고쳐 쓴 얼굴이 의아함으로 가득찼다. 그동안의 무덤덤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만큼 온갖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커프스 링크를 떼어 책상에 올려둔 제임스가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시간이 많다고."
"지금… 그 말은……. "
언젠가 정원에서 훔쳐 본 큐의 실루엣을 떠올렸다. 그가 잠시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창백한 얼굴에 내려앉던 달빛은 마치 아리아나의 눈동자에 박혀있던 별처럼 빛났다. 그건 제임스의 내면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내년은 좀 다른 곳에서 보지? 난방도 잘 안 되는 이런 사무실 말고."
"정말이에요?"
한번도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바란 적 없었다. 아니, 아예 선물을 원한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고, 눈앞의 청년은 거부하기엔 조금…… 정상은 아니었지만 차츰 나아질 것이다. 어쩌면 더 엉망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큐는 젊으니 남은 시간을 좀 더 충실하게 쓸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제임스 역시 시간이 많았다. 더 이상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이도, 안부를 묻는 이도 없었다. 삼 년째 자신을 찾아온 이 방문객 말고는.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는 많지만, 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
이전의 관계보다 더 끔찍하게 끝날 수도 있다. 어쩌면 한 번으로 만남이 끝날 수도 있고, 진저리칠 만큼 길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어차피 크리스마스니까. 한 해를 끝내는 들뜬 기분에 취해 쉽게 관대해지는 시기였다. 제임스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크리스마스를 통과하던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집에서 반짝이는 전구만 훔쳐보는 과거의 방문객. 하지만 그는 매년 내심 자신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왔음을 이제야 인정했다.
창 밖의 정원에서는 전나무가 가지를 떨며 소복히 쌓이는 눈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이미 몇 주전부터 싸구려 조명과 장식물로 온몸을 꾸민 채였다. 도심으로 끌려와 인공적인 빛과 소망을 품고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물은 조잡해 보였지만 제임스는 어쩌면 그것에게도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모두가 떠난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희미한 빛을 내뿜을 수도 있었다.
설령 가족일지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저 타인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딘가 고장난 이들은 어떨까. 가령 가슴 속에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가진 중년과 열병을 앓다 제멋대로 지껄이고야 마는 젊음이라면…… 평소답지 않게 희망에 취한 자신을 경계하며 제임스가 서둘러 큐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달아오른 체온에 제 손까지 따뜻해졌다.
*
한 번 더 쪼듯 입을 맞추며 눈을 감은 큐가 갑자기 제임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처음엔 내가 당신을 붙잡았지만… 이젠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기 전에 반대로 내게 매달리게 될걸요."
그리고는 돌아올 대답이 두려운 사람처럼 다시 황급히 입을 맞췄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마주 댄 입술이 움찔거렸지만 제임스는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