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The night is still young

 

 

큐는 생각했다.

그때 말하고 싶었던 건 아직 갚지 못한 모기지론이나 자신이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집에서 지금 주인이 무슨 일에 처한 줄도 모른 채 캣타워에 올라가 잠이나 자고 있을 델타와 엡실론이 좀 보고 싶긴 했다. 아니, 좀 많이. 하지만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된다 해도 둘의 이름 앞으로 들어놓은 특별한 생명보험이 있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머니페니가 알아서 처리를 해주겠…….

 

그래, 그때도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다만 나는 당신이 걱정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늘 이런 위험한 곳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겁니까? 그래서 죽음도 무섭지 않나요? 매번 죽을 것 같은 순간엔 무슨 생각을 하죠? 당신은 죽을 뻔한 경험도 많이 해봤으니 주마등이란 것도 겪어봤겠군요. 순식간에 지나치는 그 생각들 중에.

 

……그 생각들 중에 나도 있었나요? 한 번이라도 내 꿈을 꿔본 적이 있습니까?

 

큐는 몇이나 돌려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몇 개의 짧은 단어로 시작할 겁니다. 단어를 들었을 때 처음 연상되는 단어를 말해요.

총. 총상. 심장. 목표. 새. 하늘. 햇살. 수영. 달빛. 춤.

큐는 그가 말했던 답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미 기억에 박혀 있는지라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어떤 표정으로 답을 했는지 전부 떠올랐다.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저런 걸 물었다면 자신은 뭐라고 대답을 했을 지에 대해서. 모르긴 몰라도 분명 한정된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자신은 겪은 것들이 얼마 없었고 그가 살아온 시간에 비해 훨씬 짧은 시간을 살았으니까.

총. 가지고 와야 할 것. 심장. 상처. 새. 공원. 햇살. 블론드. 달빛. 보타이.

 

아무리 돌팔이 같은 정신과 의사라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이 녀석의 머릿속에는 어떤 남자밖에 들어있지 않구나.

혀를 찰까? 아마도. 아무튼 머저리라는 소리를 들을 만 했다.

 

그래, 그건 인정하자. 전 세계의 컴퓨터와 수많은 코드들과, 남들은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암호들을 전부 꿰고 있어도 그 남자의 말 한 마디가 무슨 뜻을 담고 있는 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큐브랜치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커다란 걸음걸이. 분명 재단사에게 개인적으로 맞췄을 게 분명한, 그리고 아마 엄청나게 비싼 그의 양복, 단단한 손끝과 햇빛 아래서 맑은 11월의 하늘처럼 빛나는 아이스 블루색의 눈과,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는 그 목소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기억과, 습관과, 그리고……, 뭐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은 이래서 무서웠다.

 

덜 떨어져 보인다는 건 당연히 알았다. 이게 바보 같은 짓이 아니면 세상에 다른 멍청한 짓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큐는 자신의 허벅지에 부착된 밴드형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25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건 앞으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시간도 2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MI6에 입사했을 때, 이런 상황들에 대한 서약서를 받았었다. 거기에는 사람이 죽거나 다칠 수 있는 가장 다양한 방법들이 적혀 있었고 -그 중에는 심지어 사무직요원이 필드직요원을 너무 놀려 화가 난 필드직요원이 한대 친다는 게 급소를 쳐서 반불구가 된 케이스도 실려 있었다- 그 종이의 가장 아래에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조약과 서명란이 있었다.

 

Q.

 

그 서명란에 적은 싸인은 한 글자였다. 그 한 글자에 대해 이렇게 큰 후회를 할 줄은 몰랐지만. 하기야. MI6의 네트워크를 해킹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 인지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의자에 묶인 손을 다시 한 번 움직여 보았으나 끈이 손목에 더 깊게 파고들기만 할 뿐 다른 변화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 더블오세븐이었다면 무식하게 커다란 팔에 힘을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이 상황을 타개했을 것이다. 필드직이랑 사무직은 다른 거라고 큐는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이제 앞으로 23분.

 

커다란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성 시스티나 성당을 본떠 만든 돔형 천장에는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었다. 궁금하긴 했다. 만약 자신이 죽으면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죽을지. 물론 이렇게 빨리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쁜 축은 아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버킹엄의 별궁. 천지창조 아래서 온 몸이 폭탄에 둘러싸여 죽다. 자신이 죽어도 M은 그 괴상한 추도사를 읊어줄까.

 

큐브랜치의 쿼터마스터로써 Q는 조국을 위해 숭고하게 목숨을 바쳤으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큐는 소름이 돋았다. 저런 추모사는 없는 게 나았다. 유언장에 추모사는 필요 없다고 적어둘걸.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죽고 나면 그 괴상한 추도사는 전부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인 걸.

 

될 대로 되라지.

 

21분. 이제는 큐도 참을 수 없었다. 분명 한 시간 전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대로 죽어버리라는 거지? 그와 동시에 정확히 귀에 껴놓은 이어커프스가 삑하고 울렸다.

 

<대체 어디야?!>

“아직도 어디냐고 물어보는 겁니까, 지금?! 21분 남았어요, 21분! 대체 그동안 뭘 한 거예요? 어디서 여자라도 만났습니까?”

<왜 이렇게 화를 내? 나도 열심히 찾고 있다고! 위치추적 장치를 깜빡하고 필드에 나가는 요원이 어딨어? 나한텐 맨날 착용하라고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은 다 부렸잖아?!>

“…….”

 

큐가 입술을 깨물었다.

 

“죽겠다고요! 당신의 쿼터마스터가 지금 죽겠다는 데 찾아오지도 못합니까?!”

<가고 있다고! 뭐, 다른 눈에 띄는 건 없어? 뭐라도 알아야 찾아갈 거 아냐!>

“천지창조요.”

<뭐?>

 

어이없다는 목소리였다. 그건 가끔 자신이 장비는 모두 챙겨오라거나 혹은 부숴먹지 말고 돌려달라고 했을 때 냈던 목소리와 비슷했다. 어쩐지 그때가 생각해서 큐는 조금 짜증이 났다. 어차피 자칫하면 죽을 텐데 짜증을 좀 부린다고 큰 일이 나진 않을 것이다.

 

“천지창조도 몰라요? 하긴, 더블오세븐은 주는 무기 고장 내거나 아니면 여자들한테 그럴 듯하게 하는 말 밖에 모르긴 하죠.”

<지금 널 구하러 갈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리지, 그거?>

“당신에게 이렇게 짜증을 낼 시간도 20분밖에 없는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봤자 안 먹혀요.”

 

이어커프스 너머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는 늘 한숨을 내쉬는 쪽은 큐 자신이었으니까.

 

“어때요?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한숨이나 내쉬는 게.”

<정말 안 좋아.>

“내 심정을 좀 알겠어요?”

<너도 이랬어?>

“당연하죠. 내가 얼마나…….”

<이렇게 죽을 것 같았냐고.>

 

큐는 눈을 깜빡였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캐롤도 느려졌다. 고, 요한, 바암. 거어, 룩한 바아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약 20분 후면 크리스마스였다.

 

지금까지 크리스마스를 바쁘게 보내본 적이 없었다. 휴가를 받으면 오래된 영화나 틀어놓고 팝콘 통을 껴안은 채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온 벌을 받는 게 아닐까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산타클로스도,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를 지금까지 보냈으니 올해만큼은 다르게 보내보라는 아기예수의 뜻일지도.

 

‘12월 24일. 할 일 있나?’

 

M의 그 말에 잠깐 틈을 보였던 게 패인이었다. M은 금방 치고 들어왔다.

 

‘그날 버킹엄 궁에 여왕 폐하를 목표로 하는 테러가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네.’

‘늘 있는 일이네요.’

‘그렇지. 늘 있는 일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나가도 되겠지?’

 

그 때도 눈을 깜빡였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보이는 M이 진짜 M이 맞는지 의심이 들 무렵, M이 입을 열었다.

 

‘물론 필드 요원은 붙여줄 거야. 알다시피 버킹엄 궁에 뭔가를 부착해놓거나 감시하거나 할 수가 없지 않나. 자네가 직접 나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요원들을 지휘하도록 하게.’

‘하지만…….’

‘잘할 거라고 믿네. 아,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던가.’

‘12월 24일이니까요.’

‘왕실 크리스마스 연회가 있을 건데, 이번 연회복장 코드가 ’동화‘라더군. 자네를 위해 옷을 보내줄 테니 그걸로 입게.’

 

그걸로 끝이었다.

 

크리스마스에 버킹엄 궁 별관에 앉아 이렇게 의자에 묶인 폭탄 고양이 신세가 된 건 전부 그것 때문이었다. 분명 머니페니가 델타와 엡실론에 대해 M에게 이야기한 게 분명했다. 연회복장이라면서 M이 보낸 옷이 하필이면 앨리스의 체셔캣이었으니까. 꼬리며 귀까지 달려 있는 체셔캣 복장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꽤 잘 만든 축에 속했다.

 

큐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블오세븐이 오고 있었으니까. 만일 잘못된다 해도 적어도 그걸로 마지막 가는 길의 위안을 삼을 순 있겠지.

 

“늘 죽을 것 같았죠.”

 

큐는 대답했다. 바깥에는 아마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었다.

몇 년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뉴스에서 몇날 며칠을 떠들어댔던 것이다. 미션을 위해 버킹엄 궁에 도착했을 때부터 하늘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런던도 새하얗게 물들겠지.

 

“당신을 보는 그 모든 순간은,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때도 자신은 이런 말을 했어야 한다.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잘 빠진 마세라티처럼 달려가는 그의 아름다운 눈을 보며 이런 말들을 했어야 한다.

 

그 말을 했으면 뭐가 좋냐고?

 

글쎄. 거기에 대해서 정확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미지수가 있는 수식에 숫자를 넣으면 답이 나온다. 아무리 어려운 암호라고 해도 결국 거기에는 해독 코드가 있기 마련이었고.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뭐가 들어있을 지 알 수가 없었다. 눈동자뿐일까. 그 말과 그 손짓과 그 심장 속에 무엇이 있을지, 자신으로써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죽을 것 같다는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죠.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여기 오면 볼 수 있는 걸 하나 알려줄까요? M덕분에 내가 지금 고양이 옷을 입고 있다는 거예요. 정말 웃긴 일이죠. 이런 멍청한 옷을 유치원 이후로 다시 입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더블오세븐? 듣고 있어요?”

 

이어커프스 안은 조용했다. 큐는 잠깐 침묵했다.

 

“더블오세븐?”

 

답은 없었다. 안경을 치켜 올리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짧게 숨을 내뱉었다.

 

“……제임스?”

“듣고 있는 게 아니라 보고 있어. 옷이 예쁘군, 큐.”

 

큐가 눈썹을 찌푸렸다. 2층의 창문들 중 하나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류 재단사가 직접 만든 슈트, 오만하게 벌린 다리, 그리고 한쪽 손을 치켜든 채 총을 들고 있는 저 그림자는 분명히.

 

“좋은 밤 보내고 있나?”

 

창문 뒤로 커다랗게 불꽃이 터졌다. 밤하늘 위로 화려하게 터졌다가 사그라드는 그 불꽃 사이로 특유의 미소가 보였다. 온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미소는 확실하게 먹혀 들어갔다. 그리고 아마, 그 역시 자신의 미소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큐가 입을 열었다.

 

“이게 좋은 밤으로 보인다면 나는 늘 천국 속에서 살고 있다고 대답해주고 싶군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그건 나중에 M한테 들으세요. 일단 이것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될까요. 이젠 9분이 남았거든요.”

 

2층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구른 본드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본드에게선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

 

“파티라도 즐기고 있었습니까?”

“내가 어떤 여자를 꼬시고 있었는지 모를 걸.”

“안 궁금해요.”

“오. 정말?”

“이런 식으로 굴 거면 그냥 가버리라구요.”

“내가 왜.”

 

본드가 위아래로 큐를 훑었다.

 

“체셔캣?”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렴 그렇겠지.”

“이제 8분 남았어요.”

 

큐가 묶은 의자 뒤로 돌아간 본드가 잠깐 끈을 잡고는 힘을 주었다. 여기서 나가면 이런 어이없는 짓을 한 녀석들에게 톡톡한 복수를 해주리라고 생각하며 큐가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제임스?”

 

다시 한 번.

 

“……더블오세븐?”

“기다려봐.”

 

뒤에서 용쓰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그걸 듣고 있던 큐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못 끊는 거였습니까? 난 내가 약해서 못 끊는 줄 알았네.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던 거 취소예요.”

“멋지다고 생각했어?”

 

본드가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노코멘트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 나올 것 같아서 그런 건가.”

“아닌데요.”

“넌 아니라는 말 밖에 못하지?”

“……아닌데요.”

“맞네.”

 

본드가 낮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줄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큐가 눈을 치켜뜨고는 본드를 바라보았다. 뒤에 앉아 있던 본드가 큐를 보면서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지금까지 무기를 제때 반납하지 않은 것도 할 수 있는데 안 한 거죠?”

“노코멘트.”

 

본드가 큐를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묶은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았던 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빠른 손길로 큐를 잡아낸 본드가 지금 뭐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잠, 잠깐! 뭐하는 겁니까?!”

“지금 못 걷지 않아?”

 

당연하다는 말투로 본드가 큐의 물음에 답했다.

 

“그건 그거고요! 왜 하필이면 또 이런 자세인데요?!”

“공주님 안기는 이제 한물갔다던데. 이걸 보고 뭐라고 하더라. ……그래, 코알라 안기라고 들었어.”

“이건 우리랑 다른 쪽 이야기거든요? 이렇게 막 사용해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뭘 해도 우리가 원조야.”

“원조할머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큐가 쟁알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듯 한 손으로 큐를 받쳐 든 본드가 주머니에서 귀마개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내가 줬던 방수용귀마개잖아요! 잊어버렸다더니!”

“그러게 말이야. 그게 이 옷에 들어 있는지는 몰랐어. 자, 일단 있으니까 껴봐.”

“내가 왜요?”

“그냥 말로 할 때, 하면 안 되나?”

 

본드의 말에 큐가 궁시렁거리면서 귀마개를 착용했다. 본드가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랗게 만들어보였다. 오케이? 큐가 고개를 끄덕거린 것과 동시에 본드가 발을 뗐다.

 

“자, 이제 갑시다. 쿼터마스터.”

 

그 말이 전부였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이라는 슬로건이 있다면 아마 그건 침대 따위가 아니라 제임스 본드의 품 안에 붙여야 할 말일 것이다. 큐는 자신이 앉아 있었던 의자와 폭탄 조끼가 순식간에 멀어지는 걸 보았다.

 

죽음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비껴나갔다. 본드가 어깨로 깬 유리조각이 바람과 함께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와 동시에.

 

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크린 너머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늘을 향해 터지는 불꽃, 코끝을 스치는 화약 냄새,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 이쪽으로 불어오는 바람, 거기에 섞인 매캐한 연기.

모든 게 진짜였다. 물론 늘 생각은 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하지만 그걸 이렇게 가까이서 느껴볼 기회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실험과 모의 전투를 치른 현장 요원들조차 처음으로 투입된 작전에서 어떤 충격과 후유증을 받는지는 이미 보고서의 수치들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모두 숫자에 불과했다. 100퍼센트 전멸이라는 종이 위의 글자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쓰러지는 걸 보는 일은 아주 다른 것처럼.

 

큐의 안경 위로 저 멀리의 불길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언제 도착한 건지 하늘 위에는 헬리콥터 몇 대가 공중 선회를 돌고 있었다.

 

큐는 천천히 귀마개를 벗었다. 그제야 사방에서 울리고 있는 사이렌 소리와, 비상벨, 도착한 구급차와 경찰차에서 나는 급박한 소리들이 귀청을 울렸다.

 

사방이 어지러운 정보들로 가득했다. 큐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정돈 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단편적인 조각들, 비명소리, 소리, 소리……. 숨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템즈강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

 

차올라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당신은 늘 이런 기분 속에서 사나요? 이렇게 숨이 차올라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차가운 강물 아래 잠겨 있나요?

 

화약과 총, 불꽃과 죽음, 가라앉는 것과 사라질 것들 사이에서. 그 사이에서 숨을 쉰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큐는 알 수 없었다. 망자들의 그림자를 덮고 그들의 저주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눈물을 마시고 한숨을 태워내는 삶을.

 

우리는 단순해야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과 악에 의문을 품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적어도 지금 하는 이 모든 일이 더 많은 선을 위한 것이라고 믿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해야 했다.

 

더블오 요원들의 평균 수명은 짧았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순탄하게 퇴직을 밟기만 해도 성공한 인생이었다. 대부분은 그렇게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매일 아침마다 생각했다. 자신의 이메일 함에 들어 있는 이 메일이 누군가의 부고를 전하는 소식이 아니길 바라면서. 그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동료애? 그런 거라기엔 그가 너무 특별했고.

사랑. 사랑이라기엔 자신이 너무 평범했다.

 

그리고.

단단한 손이었다. 큐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본드를 바라보았다. 본드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건 볼 수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큐가 본능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색이 다 빠져버린 금색에 가까운 속눈썹.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눈가의 주름과, 몇 개의 자잘한 상처가 남은 턱과…….

 

내가 당신의 쿼터마스터가 아니라 당신이 내 더블오세븐이에요.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지.

당신만이 내 유일한 호흡.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당신만이 내 지표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코드고, 내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눈동자나 다름없어요.

 

“폭발 소리는 너무 커. 필드가 처음인 사람에게는 꽤 위험하지. 나도 써봤지만 그거 꽤 탁월하더군.”

 

본드가 눈짓으로 큐가 손에 들고 있는 귀마개를 가리켰다.

 

“일부러?”

“옷 안에 있었다니까.”

 

본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지창조는 결국 심판의 불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지.”

“그걸 개그라고 하는 거라면 영 별로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네 원-피스(One-piece)개그보다는 나을 텐데.”

“다른 큐브랜치 연구원들은 재밌다고 해줬다고요!”

“오, 그건 웃어주지 않으면 아마 하루 내내 뚱한 표정을 지었을 테니까 나머지 연구원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뎅뎅.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눈은 이제 그쳐 있었다. 본드가 잠깐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군. 올해 크리스마스를 쿼터마스터와 함께 보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본드의 눈길이 큐에게 옮겨갔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파란색 눈동자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큐.”

“……메리 크리스마스, 제임스.”

 

이제 확실히 알았다.

내가 죽음에, 혹은 그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당신은 나를 구하러 올 테고 또 그걸 보기 좋게 성공시킬 것이다.

가장 힘들 때나, 가장 기쁠 때나.

큐를 내려다보던 본드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불길에 일렁이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큐의 귓가에 본드가 속삭였다.

 

“목숨도 구해줬는데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말해보세요.”

“부쉬 드 노엘까지는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 야식이라도 같이 먹는 건 어때?”

 

장난기 섞인 본드의 목소리에 큐가 픽하고 웃었다.

 

“내가 쏠게요.”

“당연하지.”

“그런데 이런 채로 두고 가도 돼요?”

“나머지는 백업팀이 알아서 처리해줄 거야.”

“평소에도 그런 생각으로 일하죠? 당신 덕분에 내가 브랜치에서 얼마나…….”

 

큐의 말이 막혔다.

한없이 입술에 가까운 뺨에 키스를 남긴 본드가 그 모습을 보더니 그건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었다.

 

“뭐, 뭐, 뭐하는 짓입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본드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들이 지나는 나무 그늘 위를 가리켰다. 겨우살이 나무에는 빨간 열매가 몇 개 맺혀 있었고 눈 속에서도 그건 아주 잘 보였다.

 

“크리스마스잖아. 겨우살이 나무 아래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랑 키스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한 해가 재수 없다는 소문이 있지.”

“그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시끄럽게 굴 줄 알았으면 오지 않은 건데 말이야.”

“당신 같은 사람한테 당해낼 쿼터마스터가 나 빼고 세상에 더 있는 줄 알아요?”

“없지.”

“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거잖아. 자, 이제 말은 그만하고 얼른 걸으면 어떨까 하는데. 그런데 말이야.”

“또 왜요?!”

“그 옷은, 그렇게 입고 갈 건가? 물론 뭐, 크리스마스니까 코스튬 플레이를 한다고 생각하면 좀 봐줄 수도 있지만.”

“……코트 좀 빌려주면 안 될까요.”

“야옹이라고 해봐.”

“…….”

“아무래도 우리 쿼터마스터가 밤이면 고양이로 변한다는 소문을 MI6인트라넷에 올려야겠군.”

“야옹.”

“한번으로?”

“나가 죽으세요, 그냥.”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난 항상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고.

그러니까 그런 말 정도는 협박도 아닐 거 아닙니까. 나가 죽어요.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가 다 빌어먹게 생겼습니다.

빌어먹을 크리스마스만큼 좋은 것도 없지. 게다가 밤은 아직 길다고.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