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어요. 나의 종교는 사랑이며, 당신은 유일한 나의 교리입니다.
-John Keats
성당 마당에 기꺼이 마중을 나오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과연- 절을 올리고, 성전 안에 들어가 성수를 손에 묻히고 성호를 긋는 제 연인의 모습은 무교인 본드에게 꽤나 흥미로운 눈요깃거리였다. -여기서 짧게나마 설명하자면 그는 적어도 무신론자는 아니었는데, 그것은 머리 한 구석으로 신의 존재만이 자신의 끊임없는 부활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신일지도 모르는 부분이고, 그는 항상 이 대목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매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 미사를 본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직접 같이 성당에 온다거나 미사를 보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하지만 많은 나라들을 방문해보았던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모종의 이유로- 본드였기에 그 모습이 낯설지는 않았으나, 마치 성녀처럼 -이 말을 듣는다면 큐가 팔짝 뛰었겠지만 그 모습마저도 귀여우니 괜찮지 않을까, 라고 본드는 생각했다.- 미사 내내 기도를 올리고 기도문을 외는 큐의 모습은 왜인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실상 큐는 불성실하고도 꾸준한 카톨릭 신자였지만.
본드는 독서 중인 여성을 손끝너머로 가리키며,
“너도 저 하얀 면사포 같은 걸 써보는 건 어때?”
제 연인이 속삭이듯 대답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제 연인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미사포에요. 그리고 저건 여자들만 써요.”
“미사포를 쓰는 이유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닐 거잖아?”
“....전통적으로 여자들만 써요. 미사나 들어요.”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 성스럽게 눈을 감고 손을 모은 큐의 옆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
크리스마스가 언제부터 연인들의 날이 됐을까, 태어난 것은 예수이며 축복받고 선물받아야 할 것 또한 예수인데. 메시아께서 오신 날이니 사람들 모두 함께 축복하고 선물을 나누는 거겠죠. 산타클로스는? 산타클로스는 왜 남의 생일날에 끼어들어 아이들을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 둘로 갈라서 선물을 주느니 마느니 하는 건데? 옛날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권선징악이죠, 당신은 나쁜 아이였나봐요. 그래, 착한 아이는 아니었지.
둘은 조용히 템즈 강변을 걸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을 에듯이 불던 바람이 메시아께서 잉태되어 태어나실 날이 -정확히는 이를 기념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기라도 한 듯 드물게 살랑살랑 불어와 큐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둘은 곧 시작 될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큐가 붉게 언 코를 훌쩍거리자 본드가 제 목도리를 벗어 큐의 목에 둘러주었다.
“지겨웠겠네요.”
“아니, 별로. 재미있었어.”
저런 종교적인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하지만. 본드는 큐가 웃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약간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곁들여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큐는 미소지었으나 그 다음의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 나도 그래요.
“넌 카톨릭이잖아?”
“반쪽짜리 카톨릭이죠.”
사실 무신론자에요. 큐가 본드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이고는 곧 거리를 두었다. 본드의 조금은 놀랍다는 듯한 표정에 큐가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푸스스 웃었다. 어떤 물리학을 공부한 너드가 신이 있다고 믿겠어요? 난 뼈저리게 현실주의자라고요.
“내가 자란 보육원이 카톨릭이었어요.”
“오.”
“그렇다보니 미사를 보고 전례를 챙기는 게 습관이 된 거죠. 습관이란 말도 웃기네요.”
당신 말대로 그런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지만, 느낌은 좋아해요. 따뜻한 느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오늘 같은 날에는 서로 손을 잡고... 우리 사실 그런 거 자주 못해보잖아요? 보육원이 카톨릭이었으면 교리교육도 받았을 것 아니야? 물론이죠, 난 세례까지 받았는걸요. 아무리 반쪽짜리여도 교리를 그렇게 쉽게 어겨? 무슨 말이에요? 혼전순결 말야. 큐의 얼굴이 붉게 피어올랐다. 반쪽짜리라니까요.
-보육원 생활은 어땠어? 카톨릭이었다고 했잖아요. 뻔하죠. 수녀님들 손에 자랐는데, 사랑받았고, 사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그렇게 크게 외로움을 느끼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13살 때 정도에는 조금 외로웠는데, 그 이후로는 무뎌졌던 것 같아요. 아무튼 눈에 띄지 않는 성격이니까 수녀님들이 날 다루는 데에 좀 애를 먹으셨을 수도 있겠네요.
보육원은 꽤 괜찮은 보금자리였어요. 말했듯이 수녀님들 손에 자랐고, 온화하신 주님의 품안에서 자라야만 했죠. 그래도 어릴 때 보육원에 들어가게 된 건데, 무신론자라니 내가 들어도 좀 웃기는 이야기네요. 아무튼 수녀님들은 따뜻하고 친절하셨고, 부모님께 버려진 제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세례도 받게 해 주셨죠. 그걸 누가 망쳐버렸지만. 큐가 본드를 향해 눈을 흘겼지만 본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도 좋았잖아. 누가 뭐래요.
아무튼,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선물도 받았어요. 아주 어릴 때는 그게 꽤나 기쁜 일이었죠. 가끔 선물이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기도문, 묵주, 성가책 같은 것들이요- 어떻게 항상 좋은 선물을 받겠나 싶어서 그냥 있었어요. 난 좋은 선물 받기에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니었으니까요.
보육원에는, 다섯 여섯 살 즈음해서 들어간 것 같아요. 아직도 그 날이 기억나는데, 부모님은 나더러 오늘 이사를 간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별로 믿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었거든요. 나름 부유한 집이었는데, 왜 이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는지 그 때는 잘 몰랐죠.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아무튼, 평소와 다르게 우리는 이삿짐을 많이 싸지도 않고, -내 작은 여행가방 하나뿐이었어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죠. 꽤 오래 달려서 도시 외곽에 도착했는데,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큰 건물이었어요. 여러 층에 하얀 벽. 앞에는 성모상 하나가 있고... 문 앞에는 어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서 계셨죠. 머리에 무언가를 쓴 같은 복장의 여성들이요. 네, 수녀님들. 우리는 그 앞에 내렸고, 부모님은 우셨어요. 나중에 데리러 오시겠다고, 꼭 기다려달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난 울지 않았던 것 같아요. 너무 어려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나 싶지만 그건 또 아니에요. 난 알고 있었는데... 그냥 그 때엔 부모님이 다시 돌아오시리라 믿었던 것 같아요.
그 말이 거짓말이었단 건 열 세 살 즈음에 깨달았죠. 나는 여전히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냥 어느 날 그 사실이 진리인 것 마냥 다가왔어요. 그 때는 좀 울었던 것 같아요. 그 분들은 나의 영웅이셨으니까요.
그리고 MI6에 들어오게 된 건, 내가 열아홉 살 때, 이런저런 곳에서 상을 좀 많이 타 올 때였어요. 상금들은 주로 보육원 운영비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물론 내 동의 하에요. 대신 수녀님들은 정기적으로 내 컴퓨터를 바꿔주셨죠. 음, 그리고, 스무 살이 되면 보육원을 떠나야 한다는 거 알아요? 난 그래서 성직자가 될까 고민도 했었는데 그건 싫더라고요. 그게 내가 MI6에 이력서를 넣은 이유에요. MI6의 보안 프로그램을 뚫고 -그건 구식 구닥다리였다고요.- 내 이력서를 보냈죠.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날 데려간 건,
M이겠지.
네, 바로 그녀요.
그녀는 나를 데려가 내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내 부모님은 스파이셨고, 테러 단체에게 쫓기다가 돌아가셨다고요. 그러면서 내게 잘 컸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M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그 때는 그녀와의 내 첫 만남이었으니 난 그녀가 그냥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내 상사가 된 이후로는 쌀쌀맞게 굴었기에 내가 무엇을 잘못 했나 자아성찰도 몇 번 해야 했지만, 곧 그게 그녀의 원래 성정이란 걸 알게 되었죠.
난 내가 참 사람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보육원 수녀님이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부모님도 날 떠나셨고, M도 이젠 우리 곁에 없어요. 그리고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본드.
난 안 죽어.
오, 이런. 어련하실까. 큐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약간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내가 당신을 거절했던 이유가 이거에요.”
큐가 본드의 품에 안겼다.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당신의 죽음을 첫 번째로 목격하게 되는 사람은 나일 테니까요.”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거엔 질렸어요. 큐가 본드의 얼굴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본드는 큐의 코를 깨무는 시늉을 했다. 큐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난 안 죽어, 큐.”
정말로, 난 안 죽을 거야. 맹세해. 내 목표는 너와 함께 죽는 거야. 절대로 널 혼자 두고 죽지 않을 거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젠장,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니...”
“애쓰셨어요, 늙다리 씨. 이제 우리 걷는 연습 할까요?”
큐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잡아보라는 것처럼 몇 발자국 크게 앞서 걸어갔다. 본드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즐거워하는 연인의 모습에 결국에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원을 기약하는 데에 있어 좀 더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몰려오는 아쉬움. 그는 이내 씁쓸함을 삼켜내고 제 연인을 따라잡아 큐와 이마를 맞대었다.
“본드, 이마에 주름.”
큐가 키득대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해줘.”
나도 노력할게.
둘은 잠시 숨이 멎을 듯한 고요함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서로의 팔을 더듬는 서로의 손뿐이었으나,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치는 순간 불꽃이라도 튄 것처럼 서로에게 입을 맞췄다. 큐가 조심스럽게 본드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자 본드의 혀는 유영하듯 큐의 안으로 들어와 그의 혀를 옭아맸다. 마치 둘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이 그것 하나뿐인 것처럼. 혀끝이 입천장을 건드리자 큐가 작게 소리를 내더니 본드의 목에 팔을 걸어 좀 더 밀착해왔다. 그리고 아주 잠깐 둘의 입술이 떼어지는 찰나의 순간.
펑-
그리고 우두두하고 귀를 간질이는 불꽃이 퍼지는 소리. 둘은 고개 돌려 확인하지 않았지만 템즈 강에서 바라볼 크리스마스이브의 밤하늘이 아름답게 수놓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 한참을 바라보았고, 먼저 입을 뗀 것은 큐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제임스.”
“메리 크리스마스, 퀜틴.”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
긴 여운의 정사는 큐를 녹초가 되어 침대와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결국 본드의 손에 씻겨져 침대에 뉘어진 큐는 눈만 빼꼼 내밀어 비몽사몽한 상태로 본드가 씻는 물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야경을 감상했다. 점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큐, 잠들었어?”
곧 욕실에서 나온 본드가 뒤에서부터 큐를 끌어안자 큐가 몸을 돌려 본드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사랑이 담긴 입맞춤 몇 번. 큐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리게 차가운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당신, 잘생겼네요. 새삼스레.
난 당신이 좋아요.
나도.
그리고 가끔은 무섭기도 하죠.
그건 의외인걸.
전장에서 구를 만큼 구른 사람이니까요. 요즘 말하는 안전이별 나는 못할 수도 있어...
나도 그 부분은 장담 못하겠어.
나 무신론자라고 했잖아요...
응.
...당신이 내 신이에요.
영광인걸.
........
자, 피곤하잖아.
...아냐, 아직 할 말 다 못했어.
그럼 얼른 해.
당신은 죽지 않을 테니까, 신이에요...
그렇지.
또, 내가 난 사람 복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당신은... 내게 신이니까 거기에 포함하지 않을래요.
으음.
당신이 내가 믿는 전부에요.
.........
큐는 그 말을 끝으로 아이처럼 잠들었다. 몸에 도는 온기에 약간은 붉어진 두 뺨을 하고서. 본드는 그런 제 어린 연인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고는 굿나잇 키스를 나눈다. 혹시 감기라도 들새라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는 그것으로 모자라 제 품에 안고야 만다. 닳을까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혹여라도 잠에서 깰까봐 좀 더 입맞춰주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그 귀여운 곱슬머리에 코를 묻다가, 이내 그 역시도 잠을 청한다.
사랑스런 당신의 잠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