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6 직원들에게는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것보다도, 아무 사건도 터지지 않은 날이라는 것이 더 중요했다. M은 오랜만에 자잘한 서류 처리만으로 오후를 보냈고 머니페니는 애인과의 저녁 약속을 잡았다. 태너는 최근 밤새 축구경기를 본 피곤함을 간만에 꾸벅꾸벅 졸며 풀고 있었고, 쿼터마스터와 더블오세븐은 쿼터마스터의 랩에서 무려 트리를 꾸미고 있었다. 물론 Q의 아이디어였다.
“제임스, 당신은 믿어본 적 있어요?”
“음?”
“산타요.”
빨간 크리스마스 양말을 트리 옆에 걸어놓으며 Q가 본드를 돌아보았다. 본드는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커다란 지팡이사탕 모형을 Q에게 건네주었고 Q는 제 키를 넘는 트리의 가지에 조심스럽게 사탕을 걸었다. 손을 탁탁 털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완성된 트리를 바라보는 모양새가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너는?”
“아마 5살까지요.”
“빨리도 컸군.”
“그래서, 당신은요?”
“…글쎄, 잠깐은 믿었겠지.”
부품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두 사람의 등 뒤를 지나가던 직원이 트리를 보고 칭찬했고 Q는 고맙다며 싱긋 웃어보였다. 본드는 저도 모르게 그 직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 직원이다.
“Q. 부하들 앞에서도 그렇게 웃나?”
“맙소사. 저 친구 부인도 있어요.”
Q가 왈칵 웃음을 터뜨렸다. 핀잔을 주면서도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한참을 깔깔거리던 Q가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그보다… 제 생각엔 찰리가 당신을 보고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본드는 Q가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 알았다. 잠깐의 야릇한 정적이 흘렀다.
“저녁에 네 플랫으로 가지.”
*
함께 밤을 보내는 건 항상 Q의 플랫에서였다. 주된 이유는 Q의 고양이들이었다. 네 마리나 되는 고양이들 중에는 본드를 아직 낯설어하는 터키시 앙고라도 있었고, 강아지마냥 반갑게 다가오는 스코티쉬폴드도 있었다. 본드가 가장 먼저 찾는 건 소심하지만 손을 잘 타는 찰리라는 이름의 샴이었는데, Q가 그 이유를 물어봤다가 너랑 제일 닮아서, 라는 답을 듣고 귀끝까지 빨개진 적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데려온 브리티시 숏헤어로 이제 막 주인에게 익숙해지는 중인 녀석이었다.
본드는 찰리와 스코티쉬폴드-해리를 무릎 위에 올려 안고 아담한 2인용 소파에 기댔다. TV에서는 아침에 봤던 여왕의 영상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고 Q는 머그 두 잔을 들고 본드의 옆자리에 와 앉았다. 받아요. 건네는 잔에는 색이 진한 홍차가 담겨있었고 홀짝이는 다른 잔에는 설탕 세 스푼을 넣은 밀크티가 담겨있었다. 홍차 중에서 Q는 트와이닝 얼그레이로 만든 밀크티를 좋아했고, 본드는 진한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를 좋아했다. 결국 타협을 본 결과 Q의 플랫에는 2주 간격으로 얼그레이와 잉글리쉬 블랙퍼스트가 번갈아 놓이게 되었다. 이번엔 얼그레이다. Q는 시트러스 계열의 향을 좋아했고 그 취향은 홍차뿐만 아니라 플랫에 놓인 방향제, 섬유유연제에서도 전부 나타났다. 본드는 Q의 플랫에 드나들면서 그 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을 때 나는 적당히 달큰한 향내를 좋아하게 되었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있는 거.”
본드는 가을 이후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영국 안에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일들을 처리했지만, MI6의 암묵적인 규칙-사내연애 금지-를 깬 것에 대한 직속상사의 응징인가 싶을 정도로 최근 Q는 야근이 잦아졌다. 오랜만의 여유로운 데이트였다.
“퀜틴.”
본드는 찰리의 연갈색 털을 쓰다듬다가 문득 Q를 이름으로 불렀다. 직장에서는 부르지 않는 이름인지라 Q는 저도 모르게 조금 놀라 흠칫했다.
“왜요?”
“내일 크리스마스인데 뭔가 하고싶은 거 없어? 가고싶은 곳이나.”
으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Q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런 거 안 챙기는데요….
“트리 꾸민 것도 이번이 처음이에요. 원래는 그런 귀찮은 거 싫어하거든요.”
“그럼 이번엔 왜 한 거야?”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본드가 묻자 Q는 반쯤 식은 머그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덧그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냥, 당신이랑 있으면 그런 것들이 하고 싶어져요.”
“어떤?”
본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지만 Q는 이리저리 눈을 돌리느라 바빠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그냥,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트리를 꾸미고, 재미도 없는 특집 프로그램들과 드라마를 가만히 앉아 보는 것. 그냥 그렇게, 특별한 날의 분위기에 취해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모두 원래의 Q라면 지독히 싫어했을 일들이었다. 본드의 널찍한 손이 Q의 뒷목을 감쌌다. 눈치라도 있는 건지 무릎 위 고양이들이 하나둘 소파를 떠났고, 짧은 입맞춤 뒤에 긴 키스가 이어졌다. 길 건너편 작은 레스토랑에서 틀어놓은 캐롤이 은은하게 커튼 너머로 들려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코끝을 맞댄 채로 본드가 피식 웃었다. 두어 번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Q도 따라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그리고 흔치 않은 휴일 아침이었다. 본드가 눈을 떴을 때 Q는 한참 잠에 빠져있었다. 나이트가운을 걸친 본드가 어느 틈에 침대 위로 올라와 고롱거리는 찰리를 번쩍 안아들어 소파에 올려놓고는 작은 부엌으로 향했다. 원두커피 한 잔을 내리고 머그를 하나 더 꺼냈다. 얼그레이 차. 우유는 컵의 반, 설탕 세 스푼. Q의 몫이었다.
“퀜틴.”
베르가못 향 속에 Q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으응… 뭐에요. 어린 연인이 드물게 잔뜩 어리광을 피우는 이 시간을 본드는 꽤나 좋아했다.
“자, 그만 일어나. 나가야지.”
“뭘 하려구요?”
안경을 찾아 쓰고 몸을 일으킨 Q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본드가 그 졸린 눈가와 헝클어진 곱슬머리를 매만져주며 씩 웃었다.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것들.”